매일신문

[낙동강 물레길] ⑦ 다사 강창교와 매운탕

박정희 前대통령 와도 매운탕만 끓여…대구시장이 행주질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강창교와 다사지역 대규모 아파트단지. 강창교가 세워지기 전인 1960년대만 해도 나룻배를 타야만 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강창교와 다사지역 대규모 아파트단지. 강창교가 세워지기 전인 1960년대만 해도 나룻배를 타야만 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금호강이 가로질러 흐르는 다사의 강창. 조선시대에는 현물 조세곡을 모아두는 창(倉)이 있었다. '강가의 창고'라는 의미로 강창이란 지명이 붙었다. 조정에서는 대구도호부 소속의 강창에 수운판관을 두고 주, 군의 조세를 모아 보관했다가 다음해 2월부터 조운을 시작해 가까운 곳은 4월까지 먼 곳은 5월까지를 기한으로 경창(京倉)에 수송하게 했다.

당시 강창은 1만여 섬의 쌀을 보관할 수 있는 창고가 설치돼 있었다. 주변의 해안창, 남창, 하빈창, 풍각창 등지에서 모은 조세곡을 낙동강을 통해 김해까지 수송했다가 다시 해로를 통해 한강까지 운반하는 역할을 맡은 곳이다. 그래서 강창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들끓었다.

강창이 매운탕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 이후다. 금호강을 경계로 다사면 죽곡동 나룻가에는 국수와 막걸리를 파는 주막이 생겨났고 반대편인 성서면 파호동 나룻가에는 매운탕 집이 드문드문 문을 열면서 날이 갈수록 문전성시를 이루게 된다.

강창나루에서 배를 기다리던 나그네들에게 국수를 말거나 막걸리를 팔던 김씨 성을 가진 할머니가 강창매운탕의 원조로 전해진다. 김 할머니는 금호강과 낙동강에서 잡은 잉어 몸통은 회를 뜨고 남은 머리부분은 버렸다. 어느 날엔 머리통을 버리기 아까워 냄비에 파와 마늘 등 양념을 넣고 끓였더니 색다른 맛을 냈다. 머리통으로 끓인 매운탕을 술 손님에게 맛보기로 선보이자 손님들의 반응이'바로 이맛이야!'며 무릎을 치고 반겼다.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손님들은 주당(酒黨)들은 제1호 안줏감으로 강창매운탕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들어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구에 내려오면 경상북도지사와 대구시장, 지역의 군사령관 등 기관장들을 대동해 강창의 매운탕 식당가를 찾곤 했다.

어느 날인가 박 대통령 일행이 강창 일대에서 솜씨 좋기로 소문난 매운탕 집을 찾아왔다. 무소불위의 권력자를 맞은 매운탕집 주인 할머니는 이들을 방으로 모시기는커녕 인사조차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 매운탕 끓이는 일에만 신경을 쏟았다. 할머니의 성미를 미리 알고 있던 대구시장이 직접 행주를 들고 상을 닦고 음식을 직접 날랐다는 일화도 있다.

물론 매운탕 맛도 좋았지만 아무리 지위가 높은 사람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매운탕집 할머니의 당당한 자세가 마음에 들어 자주 단골손님으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어느사이 강창나루 매운탕 식당의 비법이 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이때부터 전국의 강나루마다 매운탕집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강창에 매운탕집이 성업을 누릴 때인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만 대구로 들락거릴 수 있었다. 한마디로 '육지 속의 섬'이었다.

주민들이 수시로 인근 야산에서 베온 목재로 얼기설기 짜맞춰 강에다 나무다리를 놓아 봤지만 무거운 달구지라도 지나가면 찌그러지기 일쑤였다. 또 여름 장마나 태풍 때 금호강에 큰물이 한 번씩 지나갈 때마다 자취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곤 했다.

강창교 다리가 놓이기 직전까지 운수업자 3명이 각자 돈을 투자해 버스(삼천리버스)를 실을 수 있는 큰 배를 띄우고 성주에서 다사, 금호강을 건너 대구시내까지 버스를 운행해 업자들이 큰돈을 벌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최근 강창교를 찾은 한 블로거는 당시의 추억을 회상하며 한 편의 시처럼 인터넷에 글을 띄웠다.

-1948년 늦가을 고향을 떠나 어머님 손잡고 강창을 건넌 기억이 난다/6'25를 거치면서 이곳 강창에 목제 다리가 세번 놓이고, 홍수로 세번 떠내려갔다/자꾸 영화 콰이강의 다리가 연상되지만 그보다는 더 튼튼했던 걸로 안다/고등학교 졸업때까지 다리없이 나룻배로 건너 다녔다/겨울이면 얼음위로 건너가도 배삯은 주어야 했다/밤늦게 건널 때면 고함을 질러 사공을 불러댔던 것 같다/ 선거철만 되면 강창에 다리 놓는 게 선거 공약이 됐다/내가 군에서 제대하고 오니 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면서 금호강 위로 튼튼한 콘크리트 다리인 강창교가 들어서면서 강창나루터가 사라지게 된다. 게다가 금호강마저 수질오염이 심해지면서 강창나루의 매운탕 식당도 서서히 퇴락해 가게 된다.

당시 강창의 매운탕집들은 금호강에서 낙동강변인 강정유원지로 옮겨가 터를 잡았다. 또 다사읍 부곡리에는 논메기 매운탕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가가 형성되면서 옛 강창매운탕의 명성에 버금가는 매운탕 타운으로 자리 잡는다.

대구도시철도 2호선 종점인 문양역 인근인 다사읍 부곡리 새터마을은'논메기 매운탕' 마을이다. 승용차로는 성서에서 성주방면 국도를 따라가다 강창교를 건너 왕선고개를 넘어서면 오른쪽 편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논메기 매운탕의 원조로 통한다. 낙동강 변에 위치한 이곳은 1990년대 초반 논에서 메기 양식을 시작한 곳이다. 처음에는 메기 양식만 했지만 어느 날 메기 매운탕 촌으로 바뀌었다.

평일에는 줄잡아 1천여 명, 주말과 공휴일엔 2천여 명이 찾아올 정도다.

강창교를 통해 다사지역은 엄청난 변화의 계기를 맞는다. 금호강을 사이에 두고 다사면 죽곡과 성서면 파호를 이어주는 강창다리는 1971년 3월 개통됐다. 이후 강창나루와 매운탕집은 없어졌지만 다사지역은 큰 변화의 용틀임을 하게 된다.

강창교를 지나는 대구~부안선은 국도 30호선이다. 다사읍과 하빈면을 지나 성주, 김천, 무주군을 경유해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에 이르는 도로다. 5년여 공사 끝에 준공된 강창교는 폭 10.3m, 길이 245m의 왕복 2차로 교량이었다. 이후 지난 2010년 1월 폭 50m, 길이 300m, 왕복 10차로로 확장돼 온갖 차량들이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다.

대구에서 강창교를 지나 바로 닿는 죽곡. 매곡지역의 허허벌판이 이제는 고층 아파트단지가 숲을 이뤄 하늘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다. 말 그대로 상전벽해다. 인구가 급증하면서 대실 다사 문양역 등 지하철 역도 생겨났다. 대구시나 다른 인근 시군의 주민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지금부터 딱 50년 전인 1962년도 다사지역의 인구는 1천200가구, 7천400명대 수준이었다. 강창교가 개통되고부터 불어나기 시작한 다사읍 인구는 달성군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고수해왔던 화원읍을 제쳤다. 이제는 1만9천 가구에 5만8천여 명에 달한다. 6만 명 시대 진입을 눈앞에 둔 것이다.

지난해 준공된 달성문화센터를 비롯해 군립도서관(2013년 준공 예정), 세천리 성서5차산업단지 (2012년 준공 예정), 계명대 성서캠퍼스 내 동산의료원 제2병원 건립(2014년 준공 예정)이 완료되면 문화'교육'일자리'의료문제가 동시에 해결된다.

이처럼 강창교의 등장으로 다사지역에는 인구가 증가하고,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고등학교가 생겨났다. 또 공장이 늘어나고, 차량이 증가하다 보니 자연히 도로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도시철도까지 개통돼 그야말로 자급자족형 부도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달성'김성우기자 swkim@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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