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군이 기승을 부려 한때 수은주를 영하 20℃까지 끌어내렸다. 50년 만의 2월 혹한이라고 한다. 하지만 입춘이 되자 한파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 쌓인 눈이 녹고 낮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 예년 기온을 되찾고 있다.
요즘 웰빙 물결을 타고 '길'이 뜨고 있다. 전국 어느 곳 할 것 없이 걷고 달리고 오르는 것이 인기를 끌고 있다. 제주도 올레길이 뜨고, 공중파 방송 인기 프로그램 '1박 2일'이 지리산 둘레길을 소개하면서 길 열풍에 더욱 불을 댕겼다. 여기다 자치단체마다 앞다퉈 아이디어를 내고 길을 내면서 거의 매일 새로운 길이 생겨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황악산 자락에도 김천시가 '모티길'을 냈다. '모티'는 모퉁이의 경상도 사투리다. 산 모퉁이를 돌면 또 다른 모퉁이가 나타난다. '김천 모티길'은 대항면 향천리 직지초등학교에서 시작해 방하치마을과 방하재고개를 거쳐 돌모와 터목마을을 지나 직지문화공원으로 이어진 10㎞ 구간이다. 천년고찰 직지사를 연결하는 코스로, 산촌 마을 체험을 통해 옛날 전통과 조상의 숨결을 느끼면서 동심의 세계로 빠져볼 수 있다.
◆비운의 황녀가 살던 방하치 마을
대항면사무소 맞은편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들면 직지초교가 있다. 학교를 지나 개울을 따라 길을 오른다. 물길을 안내하는 개울이 굽이굽이 돌아 흐른다. 길도 따라서 굽이져 있다. 한파로 개울이 꽁꽁 얼었다. 주민들이 다니는 길이라 한적한 맛을 찾기에는 다소 거리가 있다. 길옆에 김천 명물 포도밭이 늘어서 있다. 곧장 1㎞ 정도를 가면 '향천4리 방하치'라고 돌에 새겨진 이정표가 길손을 맞는다. 마을이 방하재 아래에 있어 방하치라는 이름을 얻었다.
마을 입구에 가지런히 쌓아 놓은 돌탑과 돌단이 정겹다. 모티길은 동네를 가로질러 오르도록 돼 있다. 마을에는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아 쓰려져 가는 빈집만 여러 채 있다. 빈집에다 오래된 감나무, 쓰러질 듯한 돌담 등이 사람들이 떠난 시골 풍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 마을은 유주현의 역사소설 '황녀'(皇女)의 배경으로 등장했다. 고종황제의 숨겨진 옹주 이문용(李文鎔)이 서슬 퍼런 엄비로부터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황악산 자락 작은 마을에서 유모에게 맡겨져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그려진다.
'시오 리나 떨어진 산너머 운수골에 초상이 생겼을 때 가장 포식을 했다. 그 후로 나는 사람 죽기만을 기다렸는데 좀체로 인근 마을에서 죽는 사람이 없어서 서럽기만 했다. 그해 칠월에 홍역을 앓았다. 온몸에 함빡 발반(發斑)이 되자 사람들은 나를 얼씬도 못하게 했다. 남의 집 문전은 얼씬도 못했으며 방앗간에서도 박 초시네 헛간에서도 쫓겨났다. 나는 뒷산 비탈에 송장처럼 쓰러져 이틀 밤낮을 신음한다. 그래도 신열보다는 배고픔이 더 큰 고통이었다.'
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말 비운에 살다간 한 왕실 여인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옹주가 홍역을 앓아 쫓겨난 후 신음했던 그 방앗간은 헐리고 연자방아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개울 얼음 아래로 봄이 오는 소리
마을을 지나면 보호수인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 수령이 350년을 넘었다. 높이 14m, 둘레가 7.5m로 기록돼 있다. 주변에는 벤치가 있어 여름철에 그늘에서 쉬어가면 좋을 듯하다. 길가에는 도자기 장승들이 줄지어 서 있다. 벽돌을 쌓아 만든 솟대도 반긴다. 최근에 조성된 은퇴자 마을이다. 황토집으로 지어져 주변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마을이름은 '황녀의 마을'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농'산촌을 떠나기도 하지만 이제는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들고 있다. 마을을 지나면 오르막길로 접어든다. 임도로 조성된 탓에 도로 유실을 막기 위해 구간구간 콘크리트로 포장돼 있어 옥(玉)에 티다.
이름 모를 산새의 지저귐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하늘을 보니 검독수리 한 마리가 큰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 배가 고파 먹잇감을 찾고 있는 모양이다. 길옆 개울에서는 '졸졸졸' 소리가 들린다. 내린 눈이 녹아 개울 얼음 밑으로 흘러내리는 모양이다. 어느덧 봄이 옴을 알리고 있다. 꼬불꼬불 모퉁이를 돌다 보니 주변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어느덧 숲 속을 거닐고 있다. 자작나무 군락지를 조성해 놓은 곳을 지나면 옛날 황간현과 김산군의 경계였던 방하재고개에 이른다.
이 고개를 넘으면 대항면 대성리 공자동인데, 예전에는 거창 등 남쪽 사람들이 추풍령을 경유해 한양을 갈 때 이 길을 넘나들었다. 모티길은 고갯마루에서 큰길로부터 벗어나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 낙엽송이 줄지어 있는 오르막 경치가 일품이다. 모티길 주변은 소나무 등 침엽수는 별로 없고 참나무 등 활엽수가 대부분이다. 추운 겨울에는 앙상한 모습을 드러내 길손의 마음을 더 차갑게 한다.
◆2%가 부족한 모티길
길 군데군데 쌓인 잔설이 길손의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30분 남짓 오르자 약초'장뇌삼을 재배하는 농장이 있다. 이곳에서 모티길은 급경사를 따라 내려가야 한다. 길을 내려가면 표고버섯을 재배하기 위해 참나무를 세워 놓은 광경을 볼 수 있는데 또 다른 볼거리다.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휭하니 나무가 잘려 나간 돌모마을 산이 나온다. 자치단체에서 사유지 안으로 모티길을 냈으나 산 지주가 이곳을 호두농장으로 개간하면서 나무를 모두 베어냈다.
농장 관리인은 "공무원들이 아무런 협의 없이 모티길로 지정하는 바람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로부터 험한 욕을 먹고 있다"고 말한다.
관리인은 미안한 마음에서인지 자신의 거처로 지은 통나무집을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개방해 주고 있다. 식음료도 무상으로 제공하고 쉬어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망가진 모티길을 보면서 서두르지 말고 좀 더 아이디어를 내 제대로 된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주변을 정비해 찾는 이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도록 해야겠다. 농장 아래 돌모마을은 논밭을 개간하면 돌이 많이 나와 '돌마을'이라 했는데, 지금은 '돌모'(乭毛)라고 불린다. 늦가을에는 호두나무 군락이 온통 마을을 덮어 장관을 이룬다. 이 마을로부터 10분 남짓 직지사 방향으로 내려오면 터목마을이 있는데, 직지사를 출입하던 불자들이 터를 잡고 형성한 마을이다.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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