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삼성 라이온즈는 한국시리즈에서 또다시 해태 타이거즈의 벽을 넘지 못했다. 3차전에서 신인 투수 박충식이 181개의 공을 던지는 투혼을 발휘했지만, 삼성은 2승1무4패로 우승컵을 해태에 넘겨줬다.
그러나 그해 전혀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다. 삼성은 시즌 MVP와 신인왕을 거머쥐며 한국시리즈에서의 좌절을 위안 삼았다.
LG와 OB의 준플레이오프 3차전을 앞둔 10월 4일, 한국야구위원회는 MVP 및 신인왕 후보를 발표했다. MVP엔 삼성의 김성래'양준혁, 해태 선동열'조계현, OB 김형석이 이름을 올렸다. 신인왕 후보는 삼성의 양준혁'박충식, 해태의 이종범'이대진, OB의 김경원이었다. 그해 입단한 양준혁은 두 부문 모두 이름을 올렸다.
후보가 발표되자 바빠진 건 삼성 구단이었다. 그런데 두 부문에 각 2명씩의 후보를 낸 게 거슬렸다. 삼성은 1985년 전'후기 통합우승 당시 김시진'장효조'이만수 등 너무 많은 후보를 내, 집안 경쟁이 되면서 정작 MVP를 해태 김성한에게 내준 뼈아픈 기억이 있었다.
교통정리가 필요했다. 김성래는 그해 홈런(28개)과 타점(91개) 1위에 장타율(0.544)은 2위, 최다안타'득점은 4위에 매겨지면서 공격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양준혁의 성적도 만만찮았다. 양준혁은 타격(0.341)'장타율(0.598)'출루율(0.436)에서 1위, 홈런(27개)'타점(90개)'득점(82개)에서 2위에 오르면 공격 전 부문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성적만을 놓고 보면 결코 김성래에게 뒤지지 않았다.
둘 간의 대결이라면 누가 되더라도 문제가 될 게 없었다. 그러나 다른 후보들의 면모 역시 한 치의 빠짐이 없었다. 해태 선동열은 꿈의 수치인 0점대 평균자책점(0.78)으로 세이브왕을 거머쥔 데다 10승을 거뒀고, 같은 팀 조계현도 17승으로 다승왕에 빛났다. 더욱이 두 선수는 정규시즌 1위의 우승 프리미엄을 안은 상태였다.
다행히 신인왕에서는 양준혁의 성적이 돋보였다. OB의 김경원이 신인으로 9승3패23세이브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지만, 양준혁에겐 미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삼성은 MVP 김성래, 신인왕 양준혁으로 내부 방침을 정하고 세몰이에 나섰다. 삼성은 부상의 긴 터널을 빠져나와 그해 방망이를 지배한 김성래의 '인간승리' 스토리로 투표권을 가진 기자들에게 접근했다. 어머니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1984년 계약금 1천200만원을 받고 삼성에 입단한 김성래는 첫해 벤치만 지키다 그해 12월 유망선수 일본연수에 선발됐으나 간염으로 제외된 뒤, 1985년과 1986년 타율 0.300에 근접하는 성적으로 가능성을 보였다. 1987년 홈런왕에 오르며 전성기를 열었지만, 이듬해 수위타자 다툼이 한창이던 9월 왼쪽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으로 한동안 그라운드를 떠나 있어야 했다. 1990년 미국에서 수술을 받고 1년 반을 지루한 재활에 매진한 뒤 1992년 그라운드로 돌아와 타율 0.292에 11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재기의 몸부림을 쳤고, 마침내 1993년 최고의 활약을 펼친 잔잔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권오택 삼성 홍보팀장은 "MVP 후보에 두 선수가 올라 가만히 있다간 표 분산으로 1985년처럼 MVP를 놓칠 수 있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성적은 양준혁이 조금 더 나았지만 김성래를 밀었고, 표가 몰리도록 나름의 물밑작업을 진행했다"고 말했다.
10월 7일 투표 당일 삼성은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고, MVP 보드에 김성래에게 한 표 한 표가 기재되는 것을 보며 쾌재를 불렀다.
그날 김성래는 510점을 받아 437점에 그친 선동열을 제치고 MVP에 올랐다. 양준혁은 231점으로 3위를 차지했다. 삼성의 '후보 단일화' 작업이 기가 막히게 성공한 것이었다.
양준혁은 MVP 경쟁에선 밀렸지만 신인왕 경쟁에선 617점을 얻어 해태 이종범(343점)을 누르고 신인왕을 차지했다.
삼성은 1985년 해태 김성한(MVP)'이순철(신인왕) 이후 역대 2번째로 MVP와 신인왕을 동시에 석권하는 팀이 됐다. 양준혁은 데뷔 첫해 신인왕 타이틀에 만족했지만, 그해 인연을 맺지 못한 MVP는 그의 선수생활이 끝날 때까지도 찾아오지 않았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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