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낙동강 물레길] ⑧'임자없는 나룻배' 촬영 사문진나루

한국영화 모태 화원유원지, 낙동강 최대 관광지 발돋움

나운규, 문예봉 등 유명배우가 출연한
나운규, 문예봉 등 유명배우가 출연한 '임자없는 나룻배' . 1932년 일제치하에 개봉돼 향토색과 저항정신, 서정적인 풍경을 담아 우리 영화사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작은 사진은 당시 영화 포스트.

낙동강이 부강정에서 금호강을 만나고 바로 지척에서 다시 진천천과 합류하면서 달성습지와 드넓은 모래사장을 만들었다. 주변엔 흐드러진 버드나무 숲과 강변이 어우러져 한때 대구시민들의 행락지로 사랑받았던 화원유원지가 있다.

대구 계성학교 출신의 이규환(1904~1982) 감독이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침략과 새 문명의 침투를 상징적으로 그린 영화'임자 없는 나룻배'가 이곳 화원유원지 일대에서 촬영됐다는 사실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달성군이 옛 사문진 나루터를 중심으로 한 화원유원지에'시간의 몽타주, 사문진 영상파크'조성사업에 착수해 관심을 끌고 있다.

영상파크가 조성되면 현재의 강정고령보와 어우러져 화원 일대가 낙동강 최대의'관광 휴양지'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는 1932년 9월에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일제하에서 농토를 잃고 서울로 온 수삼(나운규 분)과 그의 아내(김연실 분)가 어렵게 살아가던 중 아내가 난산으로 갑자기 입원하게 된다.

수술비가 필요하게 된 수삼은 도둑질을 하다 붙잡혀서 감옥에 가게 된다. 세월이 흘러 출옥한 수삼은 아내가 이미 어떤 운전사와 결혼했음을 알게 된다. 수삼은 딸(문예봉 분)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강나루터에서 뱃사공으로 일한다.

딸은 어느새 처녀로 성숙하고,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평화로운 부녀의 생활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에 새로운 파란이 닥쳐온다. 그 강나루에 철교가 생기게 된 것이다. 강 하구에 교각이 세워지고 교량이 날로 뻗어나간다.

이때 철교 공사장에서 일하던 젊은 기사(임운학 분)는 딸을 유혹하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기사가 딸을 성폭행하려는 것을 목격한 수삼은 도끼로 그를 찍어 죽인다. 그리고 철교로 뛰어올라가 침목과 철도를 때려 부순다.

이때 경적을 울리며 달려오는 기차에 치여 수삼은 죽게 되고, 딸은 기사와 싸울 때 넘어진 등잔불로 인해 불붙은 집에서 타죽게 된다. 강나루 언덕 아래에는 임자 없는 나룻배만이 출렁거리는 장면을 끝으로 영화는 막이 내린다.

이규환 감독의'임자 없는 나룻배'에 대해 일제는 영화제목부터 시비를 걸고넘어졌다. 총독부에 일본인 검열관 중에 호랑이라 통하는'오까'라는 사람이 있었다.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기 며칠 전 오까는 이 감독을 불러 '임자 없는 나룻배가 나라 없는 백성을 상징하는 게 아니냐'고 추궁하게 된다. 이에 대해 이 감독은 오까를 대충 설득시키고 일단 위기는 피해 갔다.

그러나 결국 일은 터지고 만다. 단성사에서 영화를 개봉하는 첫날 이 감독이 다방에 앉아 있는데 극장 측 사람이 달려와 당장 총독부 검열실로 빨리 들어가 보라는 것이었다.

이 감독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고 필름을 갖고 총독부 검열실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오까 검열관이 펄펄 뛰면서 신문을 휙 던져주고는 읽어 보라고 고함을 쳤다.

당시 동아일보 학예부장을 맡고 있던 주요섭(朱耀燮)이 평을 통해"민족혼을 부르짖는 감동적인 작품"이라고 일갈했던 것이다. 그날 신문은 발매금지를 당했고 임자 없는 나룻배는 재검열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치닫고 만다.

상영관인 단성사에서는 상영시간이 지나자 표를 구입하고 영화가 상영되길 기다리던 관람객들로 난리가 났다.

결국 오까의 재검열 과정에서 수삼이 도끼를 휘두르며 기관차에 달려드는 장면이 잘려나가게 된다. 일제에 대한 항거를 상징하고 있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영화의 핵심장면이 잘려나갔지만 대사를 읽는 변사들이 또 다른 메시지를 던진다. 화면에 기관차가 굉음을 내며 달려오는 장면에서 변사는"괴이하도다. 저멀리 검은 그림자가 달려오는데 저놈이 누구냐. 아- 검둥이구나!"라고 외치면 객석에서는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검둥이'는 검은 제복을 입은 일본 경찰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변사들은 경찰서에 불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지만 굽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제치하에 이경손과 전창근이 상해에서'양자강'을 만들던 무렵 감독을 꿈꾸던 또 한 사람의 한국청년이 상해에 있었다. 대구 출신의 이규환 감독이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교토'에 있는 신흥키네마에서 3년간 감독수업을 하게 된다.

27세 때 귀국해 나운규 주연으로 1932년 발표한 작품이 바로 '임자 없는 나룻배'다. 일본에서도 상영돼 사실주의영화의 진수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감독은 "일본에서 돌아올 때 써 가지고 온 작품으로 스스로 항일정신과 문명 비판을 다뤄본 것인데 춘사형(나운규)이 감동하기에 다소 마음이 놓였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규환 감독은 1904년 대구에서 방랑벽이 있는 아버지 이근수와 어머니 장옥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 감독의 어머니는 한 달에 한 번 얼굴을 비칠 뿐인 남편만 바라고 살 수 없어 서울 부호였던 고모부 집으로 거처를 옮겨 가정부 일을 하게 된다. 이 덕분에 이 감독은 서울 보정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 학교 교감의 추천으로 휘문의숙(휘문중 전신)에 들어갔으나 고종사촌이 몰락하면서 학업을 중단, 서울 생활 8년을 청산하고 낙향했다.

그는 셋방을 얻어 삯바느질하는 어머니의 노력으로 대구 계성중학 2학년에 편입(1918)했으나 학과 공부보다는 예능 방면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영화를 좋아했다. 서울에 있을 때 단성사나 우미관 등 극장을 기웃거리다가 본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며 또래의 친구들 앞에서 변사 흉내내기를 즐겨했다.

그 무렵 서울의 3'1 독립운동에 이어 일어난 대구의 항일시위에도 가담한다. 시위가담자들을 모두 체포한다는 말을 듣고 경남 밀양으로 피신했다가 2년 만에 돌아온 뒤 대구에서 본 그리피스의 미국영화'침묵'은 이규환이 영화감독의 꿈을 굳히는 계기가 된다.

그 뒤 한 친구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동경의 영화예술연구소에서 기초지식을 쌓고 6개월 만에 귀국, 24세 때까지 한약방 등에서 밥벌이를 했다. 이듬해 중국 상해로 갔으나 11개월 만에 다시 상해를 떠나 일본 교토에 자리를 잡으면서 비로소 영화계 진출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다시 귀국한 뒤에는 시나리오 창작에 매달렸다. 이때 박효린 원작'임자 없는 나룻배'의 각본을 완성해 비로소 영화 연출의 염원이 이루어진다. 1932년 28세 때였다.

달성군은 화원읍 성산리'사문진 나루터'복원사업과 함께 이곳 일대에서 제작된 영화'임자 없는 나룻배'와 연계한 종합영상테마파크 조성에 나섰다. 옛 나루의 정취를 되살리고 한국영화의 모태를 복원하겠다는 것이다.

우선 올해부터 2014년까지 6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사문진 주막복원(2채), 이규환 감독 흉상 제작과 기념사업(심포지엄 및 평전발간), 원로영화인을 초청하는 추억의 영화 만남 등의 사업을 벌일 계획이다.

또 영화 관련 사업 외에 영상파크에는 다양한 문화예술 콘텐츠도 담는다. 특히 인근 마을에는 주민 전체가 하나의 공연기획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관련단체와 연계해 낙동강문화예술공동체로 발전시킨다는 구상이 주목을 끈다.

이와 함께 갤러리 나루를 건립, 영상파크의 상징물로 키우겠다는 향후 사업안도 눈에 띈다. 영화상영과 영상축제를 즐길 수 있는'시네마 데크', 문화공연장으로 쓸 수 있는 '달빛 공연터'등도 빼놓을 수 없다.

사문진교 밑에는'다리아래센터'를 만들어 지역 예술가들을 위한 주거시설도 조성한다. 나루터 인근에는 과거 융성했던 나루깡(나루시장)을 재현해 예술가들이 창작물이나 작품 등을 판매할 수 있는 예술가 시장도 선보일 계획이다.

달성군은 매년 강정고령보와 연계한 나루축제도 열어 일반시민들을 위한 돛단배 체험, 뱃놀이(사공) 체험 프로그램도 구상 중이다. 인근 천내천에는 울창한 숲길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쉼터로 제공할 예정이다.

달성'김성우기자 swkim@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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