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일찍 도착했나?' 둘러보니 넓은 운동장엔 이제 막 주차가 시작되고 있었다. 교문 앞 경찰관이 다소 생경하긴 해도 뜻밖의 고요함이 오히려 졸업식답다. 매서운 겨울 날씨 속에서도 교정 여기저기 짙푸른 소나무들이 기억 속의 옛 시절을 문득 떠오르게 한다.
교문 앞 선팅으로 가려진 경비실이 왠지 감시의 눈길 같아 조금 부담스럽다. 다소 과장된 듯 그저 그런 형태의 교사와 회색으로 조금 거칠게 느껴지는 학교 분위기가 앳되고 고운 여학생들의 모습과는 덜 어울린다.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닌 명문고교의 위상에 비하면 솔직히 실망이다. 칠순 노모를 모시고 가기엔 너무도 추운 졸업식장이었으며, 높은 천장에 빤한 현수막 하나 달랑한 행사가 송구스럽다. 마루를 보호하려 깔아놓은 비닐은 이리저리 미끌려 어수선한 졸업식의 분위기를 더욱 산만하게 했다. 좀체 조용해지지 않는 소란은 강당 내부의 정리되지 못한 건축적 느낌과 결코 무관하지 않고 요동치는 젊음의 억눌렸던 심리가 그대로 보인다는 생각에 이르자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약식 국민의례로 시작된 졸업식 행사는 곧바로 각종 시상식으로 이어지고 식순지에 적힌 수도권 대학 진학 인원 발표와 특별히 한 명 한 명 호명되어 박수와 부러움이 뒤섞인 S대 합격생들의 퍼레이드로 졸업식은 중반을 넘겼으며, 교장 선생님의 훈화와 내빈들의 축사가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나마 잠시 송사와 답사로 설핏 비친 눈물이 있었기에 그래도 분명 졸업식이었다. 행사의 의미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프로그램들과 오랫동안 변질되어 남겨진 형식과 반복적인 구성이 딸아이의 3년간 학교생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부모로서 미안함을 지우기가 쉽지 않았다. 행사 후 사용했던 교실로 향하는 이동 동선 상의 차가운 풍경과 최소한의 배려조차 지켜지지 못한 통로나 계단들이 한쪽으로만 응시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해마다 2월은 졸업시즌으로 분주하다. 특별히 올해는 두 아이의 졸업식이 연이어 있어 오래전 추억을 떠올려보게 된다. 공교롭게도 두 아이의 졸업식 참관은 많은 반성을 부추긴다. 보여지는 외형의 대부분은 자연과 생명처럼 의심의 여지없이 언제나 내재된 가치와 목적에 의해 지배되고 통제된다. 보여지는 외형이란 졸업식의 식순 같은 절차일 수도 있고, 들어서면서 선입관을 갖게 하는 건축의 공간적 느낌일 수도 있다. 가장 독창적이고 진실된 외형을 갖게 하는 공통적 조건은 행사 속에 담으려는 프로그램의 내용이며, 공간으로 이루려 한 본질적 가치에 대한 충실한 답이며, 적절한 해석이다.
만약 훌륭한 인재의 배출이 학교가 원하는 최고의 가치라면, 먼저 훌륭한 인재란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를 정의하여야 하며, 당연히 그를 위한 교육 과정과 방법에 몰두하여야 한다. 그 교육과정과 방법을 체계화하고 시스템화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좋은 건축과 훌륭한 환경의 구축이다.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그 건축이 다시 우리를 만든다"(We shape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는 W.처칠의 말처럼 건축은 감히 '교육'도 바꿀 수 있다. 좋은 건축이 혹여 비싸거나 화려한 것으로 오해되기 쉽지만, 그것은 오히려 소박하고 절제되어, 본질적인 가치가 구현된 것을 말한다. 또한 좋은 건축은 절대 홀로 조형화되지 않아 그 속에서 영위되는 우리 삶의 배경으로 존재한다.
다행스럽게도 적지 않은 수의 학교들이 형식이 아니라 뜻과 의미를 주제로 한 특별한 졸업식을 치르고 있다고 한다. 이제 더 많은 학교들이 선생님과 학생, 부모들이 함께 계획하고 참여하는 행사로, 작은 음악회 같은 졸업식으로, 학교 생활의 추억을 영상으로 담아내고 사각모와 졸업 가운으로 한층 격식을 갖춘 분위기의 졸업식으로, 신나는 음악과 정성으로 준비한 축제 같은 졸업식으로,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타임캡슐의 졸업식 등으로, 헤어지는 아쉬움과 미래에 대한 설렘으로 구성된 감동적인 졸업식으로 바꿔가길 원한다.
그리고 인성과 습관은 물론 삶의 근본이 갖춰지는 생애 최초의 사회적 공간이 학교건축이라면, 오랫동안 반복되었던 획일적 기준과 편향된 시스템에서 벗어나 다양한 욕구와 쓰임을 전제로, 건축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
김홍근/건축가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