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집을 짓는 목수를 대목장, 집에 필요한 소품을 만드는 목수를 소목장이라 부른다. 이종한(61'대구시 동구 안심3'4동) 씨는 소목장 가운데 창호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창호장이다. 그는 지난달 30일 대구시 무형문화재 제17호 창호장으로 지정됐다.
그에게 주어진 창호장이라는 타이틀은 50여 년 나무를 깎으며 외길 인생을 걸어온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다. 한평생 나무와 함께한 이 씨의 인생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작업실을 방문했다. 165㎡(50평) 남짓한 작업실에는 그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한땀 한땀 조각한 뒤 정교하게 짜맞춘 화려한 꽃살무늬 창호에서는 이 씨의 땀과 열정이 느껴졌다.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손때 묻은 공구들에서는 공구를 분신처럼 여기는 장인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봄을 재촉하는 겨울비가 촉촉이 내린 덕분에 작업실은 은은한 나무 냄새로 가득했다. 겨우내 추위를 달래려고 설치해 둔 난롯가에 앉아 향긋한 나무 냄새와 떨어지는 빗소리를 벗 삼아 그와 소담스러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입 하나 덜기 위해 배운 목수일
이 씨는 12살의 어린 나이에 나무와 인연을 맺었다. 1963년 대구 아양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 진학 대신 목수일을 배우게 된 것. "당시 한 반에 70여 명이 있었는데 중학교 진학을 한 아이는 10명 내외였습니다. 먹고사는 것이 힘들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는 아이들이 넘쳐나는 시대여서 저도 진학에 대한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입하나 덜기 위해 일찌감치 취업 전선에 뛰어든 셈이죠."
이 씨가 목수일을 처음 배운 곳은 청구대학(영남대 전신)이 동구 효목동에 세운 실습 공장이었다. 청구대학이 실습 공장을 세운 뒤 급사를 모집했는데 친구 2명과 함께 지원을 한 것이 계기가 됐다. 평생의 업이 된 목수일을 배우게 된 과정은 우연히 결정됐다. "당시 실습 공장에는 철공소, 목공소, 방직소 등이 있었는데 친구들은 각각 철공소, 방직소에 배치되고 저는 목공소에 가서 일을 하라는 말을 듣고 목수일을 배우게 됐죠. 만일 철공소에 배치되었으면 직업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 씨는 목공소 급사로 일하면서 오늘의 자신을 만든 스승 백종한 씨를 만났다. 그는 1년 동안 급사 일을 하다 목공소를 나와 스승을 따라다니며 건축 현장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배웠다. 처음에는 연장을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었다. 잔심부름만 했다. 그러다 어깨너머로 익힌 기술이 쌓이면서 대패질을 하고 문틀 짜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 씨는 15년 동안 스승을 따라다니며 기술을 하나 둘 익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배우는 과정은 참 지난했습니다. 월급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기술 하나를 배우는데도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했습니다. 하루 세 끼 끼니 걱정을 덜 수 있었고 일 배우는 재미를 낙으로 삼아 열심히 산 세월이었습니다."
◆배고픈 길, 천직으로 걸었다
이 씨는 늦은 나이인 31살에 결혼을 했다. 지금은 남자 나이 31살이면 결혼 적령기에 속하지만 당시에는 노총각으로 분류됐다. 혼인이 늦어진 이유는 목수라는 인기 없는 직업이 한몫을 했다. "당시에는 선을 봐서 결혼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여자들에게 목수라는 직업은 인기가 없었습니다. 근래에 들어 전통의 맥을 잇는 사람으로 창호장을 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지만 예전에는 배고프고 하찮은 직업으로 치부되었습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이 목수일이었기 때문에 천직으로 받아들이고 앞만 보고 걸었습니다."
당시 도편수가 아니면 하루 종일 일을 해야 겨우 끼니 걱정을 덜 수 있을 만큼 목수 생활은 넉넉지 못했다. 게다가 1980년대 들어 창호 수요까지 급감했다. 경제 개발 여파로 양옥 건축 바람이 불면서 창호는 인기를 잃어갔다. 당시 이 창호장은 처자식 배 안 곯리고 자그마한 작업실이 딸린 집 한 채 장만하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였다.
◆저축왕…국민훈장 목련장 수상
이 씨는 1990년 작업실이 딸린 지금의 집을 장만했다. 목수일을 시작한 지 27년 만에 소박한 꿈을 이룬 셈이다. 그가 꿈을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근면 성실한 성격이었다. 이 씨는 2005년 '저축의 날' 행사에서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자신과 두 아들, 부인 명의로 적금과 예금을 들어 10년 넘게 저축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그가 저축왕이 된 것은 선배 목수들의 기여(?)가 컸다. "겨울철 일감이 없어 목수가 대패 자루 놓으면 돈 떨어지고 봄에 대패 자루 잡으면 돈 들어온다는 말이 유행할 당시, 목수 사회에서 저축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한창 일할 때는 술값으로 번 돈을 탕진하고 겨울에는 돈 빌려서 생활하는 목수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목수들을 보면서 저렇게 살지는 말아야지 결심을 하고 적은 돈이라도 생기면 저축을 했습니다."
◆그에게 붙어다니는 국내 최초 타이틀
이 씨는 국제기능올림픽 창호 부문에서 입상을 한 국내 기능인 1호다. 그는 1969년에 개최된 벨기에 국제기능올림픽에 출전, 창호 부문 특상(지금의 장려상)을 받았다. "스승님 권유로 국내기능경기대회에 참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지방 및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 국가대표 자격으로 국제기능올림픽에 출전해 입상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국내 최초 타이틀이 하나 더 붙었다. 국내 최초로 창호장 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된 것. 그동안 무형문화재 부문에 창호장이 없어 창호장들은 소목장으로 지정을 받았다. 이에 대구시가 창호장이 전국적으로 극소수에 불과하고 수익성이 적어 전승기반이 어려운 점 등을 고려해 무형문화재 창호장 부문을 신설, 그를 창호장으로 지정하면서 전국에서 처음으로 창호장 무형문화재가 됐다. "창호장의 가치를 인정해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해 준 대구시에 감사드립니다. 창호장 무형문화재에 걸맞은 일을 하라는 명령으로 알고 이를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문화재 복원의 마이더스
이 씨는 소목 분야 문화재수리기능자로 문화재 복원에도 힘쓰고 있다. 그는 2010년 보물 제832호 영주 성혈사 나한전의 꽃살무늬 창호를 복원했다. 또 여러 문화재 수리기능자들과 힘을 합쳐 국보 제32호 해인사 장경판전 경판(2005~2007년)을 비롯해 보물 제145호 예천 용문사 대장전 수미단(2003년), 경북민속자료 제70호 상주 수암종택 창호(1998~2001년) 보수 작업도 펼쳤다. 지금은 경산 환성사 대웅전 창호 복원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씨는 사찰 창호 복원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전통 창호 기술의 백미가 사찰 창호에 녹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전국 유명 사찰을 찾아다니며 옛 장인들의 혼이 서린 사찰 창호를 보고 배웠다. "사찰 창호는 우리 문화유산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문양 하나하나에 불교의 교리가 담겨 있고 오묘한 불교의 교리를 구현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소목수의 장인정신이 녹아 있습니다." 사찰이 현대화되면서 전통 창호가 사라져 가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이 창호장은 여건이 허락되면 자신이 만든 전통 창호를 사찰에 보시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국가 차원의 문헌 정리 작업 필요"
이 씨의 작업실 한쪽에는 성혈사 나한전 꽃살무늬 창호 6짝이 있다. 그가 복원 작업에 참여한 경험을 살려 전통 방식대로 만든 것이다. 복잡한 문양을 일일이 조각해야 하는 까닭에 6짝을 만드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 그가 성혈사 나한전 꽃살무늬 창호를 만든 것은 기록으로 후대에 남기기 위해서다. "일제강점기 때 만든 조선고적도보라는 책을 참고삼아 문화재 복원을 하고 있습니다. 조선고적도보 외에는 참고할 만한 문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인이 만든 책을 보고 우리 문화재를 복원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래서 복원에 참여하면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통을 체계적으로 보전'계승하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문화재 기술이 구전으로 전승되다 보니 체계적으로 정리된 자료가 없는데다 전수자를 구하지 못해 맥이 끊어지는 문화재 기술이 속출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국가가 문헌으로 정리해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 "창호의 경우 문양의 종류와 특성 등을 정리해 놓은 자료가 없습니다. 그래서 같은 빗살무늬라도 영남지방에서는 쟁피살, 서울에서는 두미리살로 불리는 등 지역마다 제각각입니다. 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말로 바뀐 용어도 부지기수입니다. 이를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만일 국가에서 정리 작업을 한다면 힘이 닿는 대로 도울 용의가 있습니다."
◆창호는 세상과 소통하는 문
이 씨의 호는 인목(仁木)이다. 한눈팔지 않고 나무만 보고 살아온 그의 삶이 나무를 닮았다 해서 스승이 붙여 준 것이다. 그는 어진 나무처럼 베푸는 삶을 살고 있다. 이 씨는 2004년부터 매주 한 차례 대구교도소를 찾아 재소자들에게 기술을 전파하고 있다. "기능경기대회 심사를 맡으면서 법무부 소속으로 출전한 재소자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손재주를 가진 재소자들이 많음을 알고 지도를 자처했습니다. 제가 가르친 재소자들이 기능경기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때 보람을 느낍니다."
또 대구경북 사랑의 집짓기 운동에도 참여해 창호를 기부했다. "내세울 만한 사회사업은 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사회를 위해 제가 가진 기술을 조금 사용했을 뿐입니다. 저는 나무 냄새를 맡으면서 조각을 하고 수많은 무늬를 하나하나 짜맞출 때 행복을 느낍니다. 즐거운 일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전해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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