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은 괴물을 만들고 시련은 참 인간을 만든다.'
세계적인 약국자동화기기 전문제조업체이자 코스닥상장기업인 제이브이엠(JVM)은 꾸준한 연구와 특허획득으로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왔다. 특허분쟁과 키코사태까지 많은 시련도 겪었지만 제이브이엠의 성장세에 의문을 가지는 이는 없다.
세계시장 점유율 1위인 제이브이엠의 성공은 자전거를 타며 창업의 꿈을 키운 김준호(64) 부회장의 의지에서 시작됐다.
◆주경야독에서 창업까지
"50년 전쯤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김 부회장은 청소년기로 말문을 열면서 회사 창업에 대해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당시 성광고 야간부에 입학한 김 부회장의 사정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다. 고등학생이 되기 전 갑작스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김 부회장은 생계를 위해 약품 도매상에 취직, 약을 배달하는 일을 했다.
그는 "낮에는 약을 배달 하고 저녁에는 학교에서 공부했다"며 "그때부터 약과 인연을 맺은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약 배달은 일종의 제약회사 영업사원과 같았다. 본인이 약국으로부터 배달 주문을 받아와야 일정부분의 수수료를 받아 임금을 챙길 수 있었던 것. 사회생활이 전혀 없었던 김 부회장에게 약 배달을 주문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그때의 압박감과 위기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며 "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약국 주인에게서 호감을 얻는 방법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 부회장이 떠올린 아이디어는 약국에 아침 일찍 찾아가 청소를 해주고 약 포장을 대신 해주는 것이었다.
"1년간 그렇게 고생하니 주변에서 하나둘 나에게 주문을 해왔습니다. 정말 뿌듯했죠."
내성적이던 김 부회장이 '용기'를 얻게 된 순간이었다. 자신감이 붙은 김 부회장은 약국을 오가는 동안 약 포장을 쉽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지게 됐다. 그는 "막연히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며 "그러다 군대를 갔다 왔고 제대한 뒤에는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직장을 가진 그였지만 일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김 부회장은 "약을 포장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며 "제대로 일도 못해줄 바에는 안 하는 게 낫다는 생각에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1974년,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회사를 만들 수는 없었다. 김 부회장은 약 포장 기계에 대한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까지 3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곳저곳을 오가며 조언을 듣고 시제품을 만드는 과정을 거쳐 1978년, 마침내 첫 약 포장 기계를 만들어냈다. 김 부회장은 "당시 의료보험제도가 생겨나면서 환자들이 병원으로 밀려들었다"며 "약을 포장하는 기술이 국내에 없던 터라 기계가 인기를 끌었다"고 웃었다.
◆투병과 시련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약국 자동화장비를 홀로 만들어낸 김 부회장은 거의 독점을 하다시피 했다. 첫 제품을 만든 뒤 1년 만에 대구 북구 대현동에 사무실을 내고 직원도 고용했다. 1980년대, 그는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의 부를 일궜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1988년 김 부회장은 병원으로부터 폐암 선고를 받았다.
그는 "회사를 직원에게 맡기고 강원도 산골로 들어갔다"며 "살 수 있다는 단 하나의 희망으로 지냈고 마침내 기적같이 암이 나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회사는 만신창이 됐다. 투병기간 동안 믿고 회사를 맡겼던 직원이 같은 업종의 회사를 따로 차려나간 것. 70명이 넘는 직원 중 절반 이상이 그곳으로 옮겨갔다.
김 부회장은 "인간적으로 배신감을 느꼈지만 한편으론 CEO로서 건강을 챙기지 못한 것도 나의 실수라고 생각했다"며 "남은 직원을 데리고 다시 시작했다"고 말했다.
회사를 살리는 것은 재창업보다 더 힘들었다. 한솥밥을 먹었던 직원이 경쟁자가 된 현실도 그에게는 심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김 부회장은 "이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기술뿐이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1996년 회사를 법인으로 전환하면서 20억원을 투자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데 집중했다"고 밝혔다.
기술력으로 다시 성장 가도에 오른 제이브이엠은 결국 자신을 떠났던 직원의 회사를 자회사로 만들었다.
◆수출과 시련
회사의 성장과 함께 김 부회장은 수출에도 눈을 돌렸다. 해외 전시회를 참가하며 자사 제품을 판매해줄 회사를 찾았지만 막상 대한민국 제품을 팔겠다는 이들이 없었다. 김 부회장은 이번에도 아이디어를 짜내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는 "당시 일본 제품은 아메리소스버진이라는 회사가 판매를 하고 있었다"며 "이 회사보다 더 규모가 크고 신뢰성이 높은 회사와 계약을 하면 수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김 부회장은 당시 포천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에서 38위에 오른 매케슨 그룹을 눈여겨봤다. 1년 8개월간 매케슨을 오가며 설득한 끝에 제이브이엠의 제품이 미국 시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김 부회장은 "성공적인 미국 진출을 시작하자 일본의 경쟁사가 우리의 성장에 두려움을 느꼈는지 특허소송을 제기했다"며 "나는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특허를 침해하지 않았다고 믿었고, 끝까지 싸워서 마침내 승소했다"고 웃었다.
이를 통해 특허의 중요성을 깨달은 제이브이엠은 기술력과 특허에 집중했다. 특허전담부서를 만들고 특허등록 전문가를 4명이나 고용했다. 지금까지 300건 이상의 특허를 획득, 회사 내에는 '특허벽'이라 불리는 곳까지 생겼을 정도다.
김 부회장은 "어려운 소송과정을 겪으면서 기업은 지적재산권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우리가 글로벌 기업이 된 이유 중 하나가 국내 특허뿐 아니라 해외특허에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키코의 늪에 빠지다
마침내 제이브이엠은 2006년 주식상장까지 했다. 매년 30%에 가까운 영업이익은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김 부회장은 이때 또 다른 미래를 준비했다.
"토털솔루션을 제안하며 14가지 제품의 기술에 도전했습니다."
그가 제안한 토털솔루션은 수출중심이었다. 안정적인 수출구조를 위해 키코상품에 가입했다. 은행은 환율의 하락을 예상했지만 실제로 환율이 뛰면서 키코사태가 발생했다. 엄청난 손실을 입은 회사는 부채가 순식간에 5천700%까지 뛰었다.
김 부회장은 "내가 은행의 추천을 너무 간과했다"며 "지난해 1천80억원의 손실액을 모두 갚으며 키코사태는 마무리를 지었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운 시기에도 회사를 떠나지 않은 직원에게 감사한다고 전했다.
처음 기계를 만든 지 30년이 넘는 동안 건강과 회사를 잃을 뻔할 정도로 많은 시련을 겪은 김 부회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얼굴에 끊임없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김 부회장은 "나는 '행운은 괴물을 만들지만 시련은 참 인간을 만든다'는 말을 항상 가슴에 담고 살아가고 있다"며 "그동안 겪은 모든 어려움이 지금의 내가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한 원동력이라 생각하면 긍정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활짝 웃었다.
노경석기자 nk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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