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버려진 듯한 것들의 소중함

50대 남자 환자가 진찰실에 오셨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느냐고 여쭈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진료용 컴퓨터를 바라보신다. 다른 병원에서 촬영한, 전산에 저장된 MRI 사진을 하나하나 화면에 올려서 검토하니 오른쪽 전두엽과 측두엽에 있는 병변이 외상 후 약 3주 정도가 지난 출혈성 뇌좌상(腦挫傷:뇌가 뼈에 부딪쳐 으깨지고 출혈이 된 것) 소견에 가장 근접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진 판독지에는 출혈을 일으킨 다발성 전이성 뇌종양이 가장 의심된다고 기술돼 있었다.

왜 MRI 사진을 찍으셨는가라고 여쭈니 감기에 걸린 것처럼 머리가 아파서 찍으셨다고 대답하셨다. 만취된 상태에서 머리를 다치는 경우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예가 많아서 평소에 술을 많이 드시느냐고 물으니 아주 많이 드신다고 부인이 말씀하신다. "머리를 다치신 적은 없습니까?"하고 환자에게 물으니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하신다. 그때 따라온 젊은이가 "아버지, 약 3주 전 추운 날 등산 갔다가 술 잡수시고 담 넘어 오셨다고 하셨잖아요?"라고 한다. '아! 그랬었구나. 담을 넘다가 머리를 다칠 수도 있겠구나'하고 생각하면서 "너무나 뇌부종이 심하기 때문에 입원해서 치료를 해야겠습니다. 전이성 뇌종양도 의심이 됩니다마는 머리를 다쳐 뇌가 손상된 소견일 수도 있습니다. 치료를 하면서 출혈성 뇌좌상인지 전이성 뇌종양인지를 감별할 필요한 검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하면서 입원장을 주었다.

다음날 전공의들과 입원한 환자들에 대하여 토의하는 시간이었다. 수석 전공의가 앞의 환자를 토의하는데 MRI 사진과 CT 사진을 어렵게 판독하고는 단순 두개골 사진은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 사진을 보자고 하니 그제야 화면에 띄워 보니 왼쪽 두정골에 선명한 두 줄의 골절이 보이지 않는가! 결국 왼쪽 두정골 부위가 둔탁한 물건이나 물체에 부딪쳐 골절이 생기고, 반대 측 뼈에 뇌가 부딪쳐 손상을 입은 것이다.

단순 두개골 방사선 촬영은 옛날부터 사용해 오던, MRI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싸고 단순한 진단방법이다. 이전 병원에서 자세한 병력 청취와 함께 이 사진만 찍었더라면 환자가 전이성 뇌종양으로 진단되어 우리 병원까지 멀리 오지 않고도 치료를 잘 받았을 것이고, 전공의는 손상된 뇌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심한 변화를 보이는 MRI 소견을 그렇게 어렵게 판독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우리 삶에서도 어찌 단순 방사선 두개골 사진 같은 것들이 없으랴. 버려진 듯한 노인들의 말씀과 지혜가, 고전(古典)들의 지식이 살아가는데 때론 크나큰 가르침을 줄 때가 있다.

임만빈 계명대 동산의료원 신경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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