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大幹 숨을 고르다-황악] (9) 아! 직지사

"저 산아래 길지가…" 아도 화상 손끝에서 신라불교 요람 탄생

하늘에서 내려다 본 직지사 전경. 천년고찰 직지사가 한눈에 보인다. 눈부신 겨울 햇살이 비친 가운데 이마를 맞댄 전각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직지사 전경. 천년고찰 직지사가 한눈에 보인다. 눈부신 겨울 햇살이 비친 가운데 이마를 맞댄 전각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저 산 아래에도 가히 절을 지을 만한 훌륭한 터(吉地)가 있다."

고구려 아도화상은 선산 도리사를 지은 후 김천 황악산 쪽을 가르켜 이렇게 말했다. 이듬해 눌지왕 2년 황악산에 직지사가 불교의 요람으로 탄생된다. 황악산 직지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황악산은 최고봉인 비로봉(1천111m)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선유봉, 천룡봉, 운수봉이 있고, 오른쪽으로 형제봉 신선봉 망월봉이 자리해 마치 직지사를 품에 안고 있는 형상이다. 황악산과 직지사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불이(不二)의 관계다.

직지사를 처음 찾은 것은 1970년대 중반 고등학생 때였다. 그때는 지금 산문(山門)이 자리한 곳에 도로를 따라 나지막하고 즐비하게 상가가 늘어서 있었다. 음식점, 주점, 선물가게 등이 옹기종기 있었고 낮은 초가지붕과 토담집이 주를 이뤘다. 풍부한 계곡물을 끌여들여 한 켠에는 물레방아도 돌아가고 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변했다. 다닥다닥 붙어 있던 상가는 옛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모두 아래 넓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 새롭게 상가를 형성해 성업 중이다. 옛 상가 자리에는 직지사를 알리는 산문(山門)이 새로 지어졌다.

 

◆신라 불교의 발생지 직지사

직지사 입구는 '東國第一伽藍黃嶽山門'이라는 웅장한 현판의 산문이 선객을 맞는다. 직지사는 눌지왕 2년(418년)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고구려 승려인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선산 해평의 모례라는 사람 집에 숨어 살았다. 마침 신라 공주의 병이 난 것을 치유해준 것을 인연으로 신라 왕실의 묵인하에 포교에 나서 도리사와 직지사를 지었다. 이는 신라가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법흥왕 14년(527년)보다 110여 년 앞선 것으로, 직지사가 신라 불교의 전진 기지이자 발생지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직지사'라는 이름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고 통상적으로 말한다. "수행을 통해 욕심과 번뇌를 버리고 마음을 비우면 자기 자신이 부처요. 그 마음이 곧 불심(佛心)"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앞 두 글자 '직지'를 따왔다는 것이다.

또 직지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이 선산 도리사에서 김천 황악산을 곧게 가리키며 '가히 절을 지을 만한 터가 있다"고 하여 直(곧을 직)자와 指(손가락 지)자를 붙여 직지사로 했다는 말도 전한다. 고려말 능여 선사가 직지사 전각을 지으면서 자(尺)를 사용하지 않고 손의 뼘으로 모든 치수를 재었다고 해 '직지'라고 붙여졌다는 설(說)도 있다.

직지사는 창건 이후 645년(선덕여왕 14)에 자장(慈藏) 스님에 의해 중창된다. 이어 930년(경순왕 4)에 금자대장경 593함(函)을 조성한 기록은 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동국제일가람으로 위용을 뽐낸 직지사

직지사는 고려 개국과 함께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고려 태조 왕건과 당시 주지였던 능여 대사와의 만남이다. 왕건은 927년 공산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에 대패한 후 인동현까지 밀려 전세가 불리할 때 도움을 얻기 위해 직지사를 찾는다. 당시 왕건은 공산전투에서 신숭겸 등 장수와 군사 태반을 잃고 군졸의 복색으로 탈출할 만큼 궁색하고 남루한 복장에다 영락없는 패장의 모습이었다. 능여암에서 왕건과 독대한 능여 대사는 고민에 빠졌다. 자칫 사찰 운명까지 위험할 수 있는 결정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능여는 왕건의 기백을 읽고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군사들에게 짚신 3천 켤레를 삼게 하고 짚신짝을 하얀 눈밭에 뿌려 놓아 짚신을 줍기 위해 견훤의 군졸이 대오를 흩트리자 이 틈을 타 왕건이 황궁이 있는 개성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했으며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후 직지사에 전답 1천결(1결 2천753평)을 내려 은혜를 갚았다. 이후 고려왕실의 지원 속에 직지사는 사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이라고 불리게 된다. 직지사의 명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를 방문하면 직지사를 찾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는 얘기도 전한다.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편 조선 왕조에 들어 직지사는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의 어태를 황악산 북봉에 안치한 결과로 선종 대가람으로 인정받아 불교 탄압의 그늘 속에서도 다행히 사세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는 직지사 43개 전각 중 일주문'천불전'천왕문을 제외한 40여 개 전각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는다. 이런 와중에 직지사는 주지를 지낸 사명 대사가 승병장으로 큰 공을 세워 조선 8대 가람의 위치에 오른다.

그렇지만 1911년 일제강점기에 반포된 사찰령에 의해 직지사는 해인사 말사로 편입되는 아픔을 겪는다. 1954년 본산제도가 재편되면서 25본산에 오르고 지금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이다. 1966년부터 30년 동안 대규모 불사를 펴 20여 전각을 중건하고 오늘날 대가람의 모습을 갖추었다.

◆깨달음의 산문에 들어

직지사 산문을 들어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산문에는 '覺城林泉高致'라는 수려한 필체의 편액이 눈에 띈다. 서예 대가인 여초(如初) 김응현(1927~2007) 선생의 글씨다. 주로 직지사를 둘러보고 절을 나가면서 보게 되는 글귀이다. "깨달음의 성(城)은 곧 절을 뜻하며 절에 와서 풍성한 불법의 진리를 깨우치라"는 뜻이라는 김천문화원 송기동 국장의 설명이다. 매표소 입구 한 켠에는 김천 출신 시조시인 백수 (白水) 정완영 선생이 직지사를 노래한 시비(詩碑)가 자리한다.

매양 오던 그 산이요 매양 보던 그 절인데도/철따라 따로 보임은 한갓 마음의 탓이랄까/오늘은 외줄기 길을 落葉(낙엽)마저 묻혔고나//

뻐꾸기 너무 울어싸 절터가 무겁더니/꽃이며 잎이며 다 지고 산날이 적막해 좋아라/허전한 먹물 長衫(장삼)을 입고 숲을 거닐자 // 오가는 輪廻(윤회)의 길에 僧俗(승속)이 무에 다르랴만/沙門(사문)은 대답이 없고 行者(행자)도 말 잃었는데/높은 산 외론 마루에 起居(기거)하는 흰구름// 인경은 울지 않아도 山岳(산악)만한 둘레이고/은혜는 뵙지 않아도 달만큼을 둥그느니/ 문득 온 산새 한 마리 깃 떨구고 가노메라 // -直指寺韻 중에서 -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 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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