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기억은 거의 모두 금성산과 관련되어 있다. 내 고향은 의성군 금성면 수정1동이다. 나와 동무들의 놀이터였던 수정동과 산운동은 금성산과 비봉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동네다. '산과 구름의 동네'라고 산운동이라 이름 지었고, '물이 맑다'고 수정동이라 했다고 한다. 영천 이씨 집성촌인 우리 마을은 옛날 기와집과 산과 구름이 어우러져 있다. 10여 년 전 폐교됐던 산운초교를 생태공원으로 되살려 낸 것도 아름다운 추억을 지키려는 마을 사람들의 노력 덕분이다.
학교 수업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금성산에서 보냈다.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은 새벽 일찍 소를 몰고 가 금성산 중턱에 풀어놓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동네 아이들은 학교 수업을 마치자마자 30~40명씩 무리를 지어 금성산으로 향했다. 당시에는 산에 나무가 별로 없어 멀리서 봐도 우리 집 소가 어디에 있는지 훤하게 알 수 있었다. 재산목록 1호인 소에게 풀을 먹이고, 해 질 녘이 되면 무사히 집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 동네 아이들에게 부여된 임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간단한(?) 임무를 완수한다는 것이 언제나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소떼들은 저희가 알아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풀을 뜯고 노니는데, 하루 종일 소를 지키고 있으려면 여간 지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소를 지키는 것은 동네 아이들의 주목적이 아니었다. 언제나 몰려 앉아 재미있는 수작질 찾기에 골몰했다. 가장 흔히 타깃이 된 것은 감자밭(모내기철)과 밀밭(가을)이었다. 감자를 캐내 불을 피워 구워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먹고 뒹굴고 숨바꼭질하고, 하루해는 그리 길지 않았다.
대부분의 일과는 순조롭게 마쳤다. 해가 서산을 넘어가기 시작하면 소들을 알아서 모여들었고, 신나게 놀던 동네 아이들은 콧노래나 부르며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한 번씩은 2, 3마리씩 나타나지 않는 소들이 있었다. 자기 집 소를 챙긴 녀석들은 걱정하는 말 한두 마디 던지고 사라져갔다. 소를 잃은 녀석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산을 헤매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이 소라는 놈들은 꼭 2, 3마리씩 짝을 지어 사라진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해 진 후에 산에 남아 헤매더라도 꼭 같은 처지에 빠진 친구는 있었다. 물론 무섭기는 했지만, 그래도 친구가 있어 견딜 만했다.
행방불명됐던 소들은 주로 무덤가 주변에서 발견됐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해가 져도 나타나지 않는 소 대부분은 무덤가 주변에 모여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도 나고 반갑기도 하고 애매한 감정이었다. 그래도 녀석들을 끌고 내려오는 무서운 밤길의 걸음은 가벼웠다.
최악의 경우는 끝내 소를 찾지 못한 상황이다. 당시 소는 집안의 재산목록 1호였다. 아무리 어리더라도 소가 얼마나 소중한지는 잘 알고 있었다. 눈이 퉁퉁 붓도록 엉엉 울며 집으로 내려올 때는 무서운 생각조차 할 틈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온 마을에 비상이 걸렸다. 동네 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산으로 총출동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놀라운 단결력이었고, 참으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마을에 몇 번 소동이 난 적은 있어도 결코 소를 완전히 잃어버린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소를 잃어버린 경우 말고도 2, 3년마다 한두 번쯤은 온 마을이 금성산으로 총출동하는 비상사태가 생겼다. 가뭄이 들 때였다. 마을 뒤편의 금성산은 명산으로 알려져 "묘를 쓰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 금성산 정상에 묘를 쓰면, 가뭄이 든다"는 속설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가뭄이 드는 원인으로 누군가 금성산에 몰래 묘를 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응징하러 나선 것이다.
하지만 몰래 묘를 만들면서 남의 눈에 띄게 할 리는 만무하다. 주로 머리카락이나 손톱, 발톱을 몰래 묻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가뭄의 근원(?)을 찾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래도 문제는 없었다. 해결책을 또 다른 속설이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똥물을 뿌리면 묘의 효험은 없어진다." 누군가 진짜 금성산 정상에 남몰래 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뭄이 들 때마다 금성산 정상은 똥물 세례를 받았고, 마을 사람들은 이를 신성한 사명으로 여겼다.
의성을 대표하는 마늘은 금성산의 축복이다. 아주 오래된 화산인 금성산 덕분에 마늘 재배에 적합한 토양이 만들어졌다. 어린 시절 마늘은 그야말로 '환금작물'이었다. 엿장수가 동네에 나타나면, 어른들 몰래 말리고 있는 마늘을 훔쳐 엿으로 바꿔 먹었다. 꿀맛이 따로 없었다. 아무리 혼이 나도 엿장수의 유혹은 뿌리치기 힘들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천진난만하던 시절은 막을 내렸다. 가난한 농사꾼 아버지는 10남매의 맏이였고, 밑으로 4남매를 두셨다. 장남인 내가 중학생이 되자 농사만으로는 생계와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어머니께서 마침내 결단을 내리셨다. 보따리 장사를 하겠다고 하신 것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반대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영천 이씨'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셨던 만큼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어머니의 각오를 꺾지는 못했다. 보따리 장사를 시작한 어머니는 나중에 화장품 외판원으로 변신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어머니의 '각오'가 자식과 손자들의 운명까지 결정지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 했다.
어머니의 화장품 외판원 생활이 내가 37년간 화장품 업계에 몸을 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의성 탑리에서 시작한 화장품 대리점은 대구 중앙지하상가를 거쳐 동성로로 근거지를 옮겼고, 이제는 화장품 업계에서 나름대로 입지를 다졌다. 아내도 의성에서 화장품 대리점을 하다가 만났고, 4남매 모두 화장품 업계에 종사하고 있다. 아들 역시 화장품 회사에 근무하며 3대째 화장품 인생을 이어가고 있다. '체면' '위신' 다 버리고, 자식들을 위해 떨쳐 일어나 온갖 어려움을 무릅쓴 어머니 덕택에 3대가 다 같이 먹고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울컥하는 마음이 든다.
요즘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고향을 찾는다. 어머니께서 고향에 계시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뵐 때마다 좀 더 잘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어릴 적 고향의 풍경과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만 클로즈업된다. 내가 비록 큰 부자는 아니지만, 고향에 조그만 도움만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이유도 '어머니'와 '어릴 적 고향의 풍경'이 하나인 탓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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