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좋은생각 행복편지] 풀꽃과 나무들의 항의

"우리의 존재를 인정하라! 인정하라!" "­우리도 이 학교 식구다! 식구 대접 똑바로 하라! 똑바로 하라!"

수업 시작을 알리는 차임벨 소리에 흩어져 놀던 아이들이 모두 교실로 들어가고, 교정은 다시 봄볕의 발걸음 소리라도 들릴 듯 고요한 평화 속으로 잠겨들 무렵이었습니다. 갑자기 운동장 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 얼른 신발을 갈아신고 나가보니, 아, 이 무슨 이런 일이! 학교 울타리 안에 사는 온갖 나무와 풀꽃들이 떼를 지어 구호를 외치며 교장실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소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모과나무, 석류나무, 동백나무… 그 뒤로, 새봄을 맞아 구석구석에서 고개를 내민 작약, 씀바귀, 냉이들이….

현관 입구에서 행렬을 막아서자, 교장실 앞 화단에 사는 키 큰 소나무가 앞으로 나서서 삿대질을 하듯 가지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제가 교장실 유리창 너머로 봤는데, 올해도 학교 현황판에서 우리의 존재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 학교는 837명의 학생과 62명의 교직원만 사는 곳이 아니라, 5만7천648그루의 나무와 325만7천892포기의 온갖 풀꽃들이 함께 사는 세상입니다. 우리도 이 학교의 엄연한 식구란 말입니다. 연못의 금붕어나 수천만 마리의 곤충들도 이러한 차별 대우에 불만이 큽니다."

"제발, 잡초라고 천대하며 우리의 생명을 함부로 빼앗지 마셔요. 우리도 세상에 나와 살아보겠다고 한 뼘 땅 조각을 겨우 차지하고 큰 나뭇가지 사이로 햇볕 몇 줄기씩 모아 좁쌀 같은 꽃을 피우기 시작했는데…."

화단을 정비하던 학교 아저씨의 호미 날에 뿌리가 끊긴 민들레가 말을 잇지 못하고 앙앙 울음보를 터뜨렸습니다. 그 틈에, 병들었다고 교실에서 쫓겨난 철쭉의 볼멘 목소리가 이어졌습니다.

"교실의 화분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십니까? 데려갈 때는 예쁘다고 호들갑이지만, 이내 관심 밖으로 밀려나 물 한 모금 제때 얻어먹을 수 없을 때가 많아요. 그러고도 생명을 존중하자고 잘도 가르치고, 잘도 배우고, 또 시험 칠 때는 정답을 잘도 써 넣습디다. 학기말이 되면 식물병원마다 학교 주변에서 수거되어 온 환자들로 흘러넘치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철쭉의 하소연이 끝나기도 전에, 교수형을 당한 것처럼 윗가지가 싹둑 잘린 개나리 나무들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며 악을 썼습니다.

"아무리 무식해도 그렇지, 무슨 놈의 가지치기를 그따위로 한답니까? 새봄에 꽃등 달 가지들을 싹둑싹둑 다 잘라 버렸으니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안타깝고 분합니다. 이 화창한 봄날에도 캄캄한 우리들 가슴속을 짐작이나 하십니까? 우리를 식구로 여겼으면 이따위로 취급했겠어요?"

격렬한 항의에 쩔쩔매며 어쩔 줄 몰라 허둥대는 모습이 딱해 보였던지 지나가던 바람이 "그만하면 교장 선생님도 알아들었을 테니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요즘 인간들은 걸핏하면 떼거리로 몰려가 떼를 써서 결국 자기네에게 유리한 떼법을 만든다고 하지만 착한 너희들마저 떼거리로 나서 떼를 써서야 세상 꼴이 되겠느냐"고 타이르자, 나이가 지긋한 느티나무가 손사래를 치면서 점잖게 나섰습니다.

"바람은 당사자가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시게나. 교장 선생님! 사실 저는 교목(校木)이어서 대접 잘 받고 있지만 지금 이 친구들의 울분을 그냥 대충 듣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며칠 전 신문조각에 '지금은 자기 권리 챙기는 국민의 시대를 지나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 시민의 시대가 오는 줄 알았더니 자기 새끼만 아는 축생이의 시대가 왔다'는 말이 있었어요. 학부모들까지 아예 한쪽 눈만 뜨고 나오니 모두가 외톨이가 될 수밖에요. 그래서 잘난 나만 있고 정다운 너는 없는 곳이 바로 학교래요.

이런 풍토를 고치자면 더불어 사는 터전을 만들어 가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어요. 함께 살아가는 식구들 사이에 소통이 원활히 일어나서 관계가 회복되고 이를 바탕으로 진정한 생명공동체가 구축되어야 해요. 그리고 소통의 첫걸음은 자연과의 대화라는 겁니다.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서리에 지천으로 퍼져 있는 저희 풀꽃이나 나무들과 정답게 눈을 맞추고 이름을 불러 주는 것, 세상과의 건강한 소통은 여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이 항의하는 뜻을 잘 알았으며, 교장인 내가 판단해서 조치를 할 테니 아이들이 수업을 마치고 나오기 전에 제발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사정했지만, 현황판에 당장 자기들의 이름과 식구 수를 써 넣어주지 않으면 해산할 수 없다고 하며 다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생각을 바꿔라! 바꿔라!"

"이런 홀대 받고는 잎도 꽃도 피우지 않겠다! 않겠다!"

김동국/시인·대구두산초등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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