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사이'에 길이 있다

"자네, 길을 아는가." "…."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닐세. 바로 저 강 언덕에 있는 것을." "…." "이 강은 바로 저와 우리와의 경계로서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지. 무릇 세상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은 마치 이 물이 언덕에 제(際)함과 같으니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곧 그 '사이'에 있는 것이네."(박지원의 '열하일기' 중에서)

요즘 나의 언어와 언어의 갈피엔 채 아물지 못한 상처 입은 꽃씨들로 가득하다. 여전히 내 언어는 많이 나아가지 않는다. 언제 피었다 졌는지, 언제 상처를 보듬을 수 있을지 나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언어는 내 삶의 알맹이다. 설익은 욕망을 어금니 가득 빼물고, 내 부끄러움들이 수상하게 거리에 휘돌고 하루하루 만들어지는 답답한 언어들이 불면을 넘어 날아온다.

문득 아직은 멀었노라고 누군가 귀엣말을 한다. 언어가 걸어갈 방향을 정하고 싶다. 나만의 언어는 이미 저기에 있는데 거기로 걸어가는 길은 가파르기만 하다. 수많은 거짓말들 속에도 하나의 진실이 있듯이 방법이 다르고 가치가 달라도 그 길이야말로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아닌가? 단지 내 언어를 향해 걸어가는 사실적인 해답과 마음을 알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 어디에도 사실적인 해답과 마음은 없다.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고 서로를 물어뜯는 시간과 공간만이 세상에 가득하다.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면 이편에서도, 저편에서도 물어뜯는다. 덜 상처를 받으려면 어느 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21세기의 '지금, 여기'가 지닌 사실적인 해답과 마음의 풍경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내가 찾고자하는 언어가 없다. 세상에는 기다리는 것과 그래도 오지 않는 것이 있다. 중요한 건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는 현실이다.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것은 슬프게도 어느 자리에 박힌 표석이나 어느 공중에 휘날리는 깃발처럼 단단한 목표나 구체적인 꿈이 아니라 몇 개의 단어와 단어들이 거느린 흐릿한 이미지들, 언어들 '사이'의 그리움일 뿐이다. 그게 오히려 진실이다.

연암 박지원은 말했다. 진리는 바로 그 '사이'에 있다고. '사이'는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 어렸을 때는 단지 '사이'라는 단어가 사이비를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요즘 나는 사이비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 의미를 능동적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사이'는 오히려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하다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사이'는 무의미하다. 어차피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사이'는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해야 한다. 그것은 소통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이것이 아니라고 거대한 벽을 만들어 저것을 거부하면 저것도 벽을 만든다. 그 벽을 사이에 두고 끝이 없는 대립과 갈등만 존재한다.

'사이'는 물리적 의미의 사이가 아니다. 진리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없다. 바로 '사이'에 있다. 이것이 저것을 끊임없이 '접속'하고, '횡단'하고, '생산'하는 그것이 '사이'의 의미다. 그런 점에서 '사이'는 묘한 연대를 필요로 한다. 느슨하면서도 집요한 덩이줄기 같은 연대, 자유로우면서도 거기에서 질서를 창조하는 끈질긴 연대,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면서도 경계 바깥의 세계를 배려하는 연대, 나도 중심이지만 타인도 중심이라고 인정하는 연대, 보편적인 철학을 추구하면서도 개별적인 마음을 인정하는 연대, 그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21세기의 풍경이다. 이른바 시대정신이다. 아이들에게도 '사이'를 가르쳐야 한다. '사이'를 통해 서로 배려하고 나누는 삶을 가르쳐야 한다. 그럼으로써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 사회를 '사이'가 만들어가는 따뜻하고 행복한 풍경으로 채워야 한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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