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다는 아주 몽환적이다. 때론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그 몽환 속에 잠들어 있는 겨울바다란 악보를 연주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고요와 적막뿐이다. 정적(靜寂)이란 데시빌을 최대치로 높여 놓을 때가 눈이 오는 겨울바다의 아침나절이다. 그때 바다는 어떤 악기의 소리도 거부하고 오로지 바람에게만 활을 맡겨 연주를 하게 한다.
바람은 아무런 악보 없이 바이올린을 켜듯 활을 짧게 밀고 길게 당기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수평선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는 바닷새들의 몸짓을 음표인 양 읽고 무심한 척하면서 음 하나, 박자 하나 놓치지 않고 그렇게 연주를 하는 것이다. 그 음악은 귀로는 들을 수가 없고 다만 두 눈에 전달되는 음감을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 나는 겨울바다가 전해주는 무언의 메시지 같은 '겨울교향곡'을 사랑한다.
겨울바다는 귀가 어두운 베토벤의 제5번 심포니 '운명'이 '적막을 위하여'란 부제를 달고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연주하는 야외공연장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고요'라는 주제의 소묘작품들이 무진장으로 널려 있는 노천미술관이기도 하다. 선창에 정박하고 있는 어선들, 섬으로 연결되어 있는 출렁다리, 폐선의 녹슨 닻 등이 쌓여가는 눈(雪)에 자기 본래의 색깔을 헌납하고 흑백사진과 같은 수묵의 뼈다귀만 드러내놓고 있다.
겨울바다는 무음(無音), 무반주(無伴奏), 무필(無筆), 무채색(無彩色) 등 무(無)자 화두 하나씩을 들고 동안거에 들어 있는 바닷가 선방이다. 그래서 겨울바다는 외롭고 쓸쓸하다. 모든 외로운 것들은 그 존재의 쓸쓸함을 치유하기 위해 누구에게서든지 위안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위안이란 자체가 사실은 공허한 것이다. 무대에 선 가수에게 터지는 스포트라이트 속의 갈채는 무한한 칭송이지만 무대의상을 벗어버린 빈 몸은 허허롭기 짝이 없다. 불안한 내면을 남들이 엿볼까 봐 조바심하다 끝내 술과 마약에 기대지만 그것이 영생을 약속해 주지는 않는다. 마릴린 먼로와 휘트니 휴스턴의 짧은 삶이 그랬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정호승의 시 '수선화에게' 중에서)
그리움에 지쳐버린 사랑하는 사람들만 외로움을 느끼는 건 아니다. 법당의 중앙에 앉아 계시는 석가모니 부처님도 우물천장 밑 빈방의 공허가 너무 쓸쓸해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계신다. 하나님 아버지도 너무 외로워서 "찬양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며 인간들을 다그친다. 아마 그것은 인간들의 나태를 질책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잘못을 반성하여 목표하는 바를 성취하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겨울바다는 허영이자 사치다. 나는 겨울바다를 좋아하지 않았다. 생선회의 유혹이라면 몰라도 내 문학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겨울바다를 찾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의 무턱 댄 겨울바다에 대한 동경과 그 센티멘털리즘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사실이지 겨울바다 예찬론자 중 겨울 내내 바다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눈 내리는 남도 바닷길 여행을 떠났다가 제대로 된 겨울바다를 만났다. 강진 인근의 마량포구 초입에 있는 바다 펜션(대표 이봉석'061-432-7979)에서 조용히 내려앉은 겨울바다의 저녁 풍경을 보았다. 이 동네 겨울바다는 내가 여태 봐 왔던 그런 바다가 아니었다. 식욕이고 문학이고 모든 걸 집어치우고 '그냥'이란 낱말을 앞세워서라도 찾아와야 할 겨울바다, 고요와 적막을 음악으로 들을 수 있는 그런 겨울바다였다.
추억은 기억의 화면이 아닌 소리로 복원될 때 가장 명징하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가 완연한 봄이 올 때까지 이곳 겨울바다에서 연주되고 있는 '적막을 위하여'란 심포니가 귓가에 계속 들려올 것만 같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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