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대한민국 국부(國富)의 뿌리 진주 지수의 재벌송

초교생 2명이 심은 나무…훗날 삼성'LG 창업

올해 첫 답사지로 경남 의령을 선택했다. 임진년이라 420년 전 왜란으로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같이 위태로울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1552~1617) 장군의 유적지를 돌아보며 나라 사랑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되새겨보고, 삼성 창업자 호암 이병철과 LG창업자 연암 구인회가 심었다는 재벌송(財閥松)을 보면서 부자가 되는 기를 얻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호암, 망우당 생가와 사당인 충익사를 둘러보고 솥바위로 향했다. 충익사는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종가시나무, 수형이 아름다운 모과나무, 상상을 초월하게 큰 뽕나무 등 경내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의령과 함안 사이의 남강에는 정암(鼎巖)이라는 바위가 있다. 생긴 모양이 가마솥과 같다 해서 '솥바위'로 오히려 더 잘 알려져 있다. 현대식 다리(정암교)가 놓이기 전에는 경남 내륙의 농산물과 남해안의 해산물의 교역이 활발했던 나루터이자 임진왜란 때에는 곡창지대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왜군을 저지시킨 역사의 현장이다. 1592년 5월 24일 망우당이 이끄는 50여 명의 의병(義兵)이 2천여 명의 왜군을 물리쳐 이순신이 거느린 수군을 제외한 임란 최초 육전(陸戰)에서의 승리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전투의 승리를 기화로 의병의 참여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일본이 조총이라는 막강한 화력과 잘 훈련된 군사를 가지고도 조'일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것은 추운 겨울을 대비하지 못한 점, 명의 파병으로 조선군의 전투 병력이 보강된 점도 있었지만 지역 사정에 밝은 의병들이 왜군의 긴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그들의 활동을 위축시킨 점이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암진 전투에서만 해도 제대로 훈련이 안 된 의병들이 많은 수의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데에는 망우당의 탁월한 전략이 있었다. 강(江) 남쪽에 당도한 왜장이 미리 정찰대를 보내 도강이 용이한 코스에 팻말을 꽂아 두고 다음 날 강을 건너려고 했다. 이 사실을 안 망우당은 늦은 밤 팻말의 위치를 도하(渡河)하기 어려운 늪지대로 바꾸어 꽂았다. 이튿날 맞은편에 매복해 있다가 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기습해 거둔 승리였다.

이런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현장의 남강 솥바위에는 세발이 뻗쳐 있고 그 세발의 20리 내에 3명의 큰 부자가 날 것이라는 전설이 오래전부터 전해지고 있었다. 실제로 의령군 정곡면에서는 삼성의 창업자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 1910~1987), 진주시 지수면에서는 역시 LG창업자 연암 구인회(具仁會, 1907~1969), 함안군 군북면에서는 효성그룹 만우 조홍제(趙洪濟, 1906~1984)가 각각 출생했다.

이들이 설립한 기업은 재계 선두인 삼성을 비롯해 오늘날 한국 경제계를 이끌어 가고 있다. 연암과 호암은 경남 진주시 지수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다. 토박이 연암은 한학을 공부하다가 1921년 2학년에 편입하여 1924년까지 다녔고, 집이 의령이고 연암보다 세 살 어린 호암은 의령에서 역시 한학을 배우다가 1922년 편입, 6개월 동안 다니다가 서울로 전학했다고 한다. 호암은 지수로 시집온 누나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두 사람은 같은 반으로 출석부 명단에 연암은 6번 호암은 26번이었다고 한다.

재학 중 그들은 각기 어린 소나무 한 그루씩 심었는데 지금은 몸체가 붙어 마치 한 그루처럼 서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나무를 두 그룹의 창업자가 심었다고 해서 '재벌송'(財閥松)이라고 부른다.

때로는 경쟁자로 때로는 협력자로 갈등을 빚은 때도 있었지만 이러한 선의의 경쟁이 결과적으로 세계적인 기업에 이르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여느 시골이 다 그렇지만 이곳 지수도 인구가 줄고 세계적인 기업의 창업자가 다녔던 학교도 폐교되었다. 교적비에 의하면 1921년에 개교한 이 학교는 모두 4천324명을 배출했다고 한다. 이들 중에 호암과 연암은 물론 연암의 동생인 구철회 LG그룹 창업고문, 허정구 전 삼양통상 명예회장, 허준구 전 GS건설 명예회장, 연암의 장남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도 포함되었으니 지수초등학교는 우리나라 재벌의 산실인 셈이다.

그러나 옛 지수초등학교는 적막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호암이나 연암 두 사람 중 누가 심은 나무인지 알 수 없지만 한 그루는 생육상태가 좋지 못하다.

열 살 전후 꿈 많은 소년들이 심었던 나무는 이제 2층 교사(校舍)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크게 자랐다. 호사가들의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데도 소재를 알리는 안내판이 없어 현장을 찾는데 애를 먹었다. 두 사람의 성공은 개인에게도 영광이지만 가깝게는 지수면민, 멀게는 나라에서도 자랑스러운 일이다. 아끼고 보살피는 일에 보다 적극적이었으면 한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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