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古宅은 살아있다] <10>포항 덕동마을

임란 피란 길지…수백년 집 즐비한 '박물관 마을'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사우정(四友亭) 고택 뒤안. 고택을 관리하는 여강 이씨 11대손 이희국(83) 씨 부부가 조선시대 부인이 안방과 인접한 부엌 뒷문으로 바깥 출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씨는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사우정(四友亭) 고택 뒤안. 고택을 관리하는 여강 이씨 11대손 이희국(83) 씨 부부가 조선시대 부인이 안방과 인접한 부엌 뒷문으로 바깥 출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씨는 "당시 여자들은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를 피해 뒷문이나 옆문으로 돌아다녔다"고 말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사우정 고택 사당에서 내려다보이는 용계계곡이
사우정 고택 사당에서 내려다보이는 용계계곡이 '재물이 집안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풍수에 따라 계곡의 물길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인공으로 조성한 숲. 2006년 산림청과 생명의 숲이 실시한 제7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덕동마을 앞 용계계곡에 들어선 용계정(龍溪亭).
덕동마을 앞 용계계곡에 들어선 용계정(龍溪亭).

포항의 가장 북쪽, 청송과 마주한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이곳은 예로부터 덕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해서 덕동(德洞)마을이란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조선 선조 때 북평사를 지낸 농포 정문부가 피란처로 삼기 위해 처음 터를 세운 후 손녀 사위인 사의당 이강에게 집을 양도하면서 지금은 여강 이씨의 집성촌이 됐다. 길게는 500년, 짧게는 200년의 세월을 견딘 집들로 가득한 이곳은 마을 자체가 하나의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소나무가 아름다운 덕동마을

서포항 나들목을 빠져나와 승용차를 타고 청송 방면으로 20여 분 가다 보면 소나무로 둘러싸인 아담한 덕동마을을 만날 수 있다. 마을 전체를 가득 메운 소나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송을곡(松乙谷)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왜병이 '송'자가 들어간 지명에서는 반드시 패전한다는 설이 있어 농포 정문부가 이곳을 피란처로 삼았으며 이후 손녀 사위인 이강에게 집을 양도했다.

이강은 조선의 대유학자인 회재(晦齋) 이언적의 동생 농재(聾齋) 이언괄의 4대손이다. 이강은 고향인 경주 양동마을에서 50리 떨어진 이곳에 거처를 정하고 360여 년간 대를 이어 살면서 여강 이씨 집성촌을 이뤘다. 또 이언괄은 형인 회재 이언적이 관직에 나가면서 어머니 봉양을 위해 이곳에 눌러앉아 자손 대대로 덕동마을을 문사의 마을로 만들었다.

이 마을은 천혜의 자연조건과 독특한 문화를 높이 평가받아 1992년 문화부 지정 문화마을로, 2001년에는 환경친화마을로 지정받았다. 또 덕동마을 숲에는 소나무 외에도 200년생 은행나무와 160년생 향나무 등 고목들이 있으며, 환경친화마을 지정에 따른 지원사업으로 마을 저습지에 건립된 연못 또한 도시민들의 쉼터로 사랑을 받고 있다.

◆사우정'애은당 고택

농포 정문부가 처음 터를 잡고 후일 사의당 이강에게 물려준 집은 현재 이강의 호를 따 사우정(四友亭)이란 이름으로 전해져 온다. 1988년 9월 23일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81호로 지정됐다. 정문부의 조부인 정언각이 청송부사로 재직 당시 지리에 밝은 청지기가 일러준 길지로, '활란가거 천하지낙양'(活亂可居 天下之洛陽)이라 불렀다고 한다. 사우정은 당시 일반 사대부 집의 모양과 크게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어 역사학적으로 귀한 사료로 손꼽힌다. 사우정은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 7칸, 측면 1칸 반인 '-'자 형태의 사랑채가 정면을 모두 차지하고 있다. 사랑채 양쪽을 돌아들어서면 다시 정면 5칸, 측면 4칸인 '∏' 형태의 본채가 보인다. 마치 사랑채가 두 팔을 벌려 안채를 가로막고 서 있는 형국이다. 본채는 농포가 1600년대에 지은 것이며 사랑채는 이강이 100여 년 뒤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랑채는 1m 높이의 돌담 위에 세워져 약 6m 높이의 위용을 자랑한다.

사우정의 높이에 관해서는 또 다른 재미난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일제강점하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신돌석 장군이 소싯적 학문을 수양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가 타고 온 말의 힘이 너무 좋아 단숨에 사랑채를 뛰어넘었다는 전설이다. 피란처로 시작된 곳이지만, 이곳도 전란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한국전쟁 당시 사우정 바로 앞까지 포탄이 떨어져 사랑채 곳곳에는 지금도 그때의 피격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또 인민군에게 군사 지휘부 장소로 뺏겨 군인들이 약 20일간 거주한 기록도 전해져 온다. 현재는 여강 이씨 11대손 이희국(83) 씨가 맡아 관리하고 있다.

이 씨는 "선조들이 누대에 걸쳐 향방의 수장을 맡으면서 1만5천 호를 관리했다고 한다. 그만큼 사우정은 덕동마을의 머리와 같은 부분이며, 시대의 변화를 간직한 곳"이라고 말했다.

사우정과 같은 시기에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80호로 지정된 애은당(愛隱堂) 고택은 1695년 3월 이강이 자녀 7남매를 출가시키면서 4남인 이덕소의 분가로 관리해 오다가 현재의 소유주인 이문희의 6대조 이재급이 매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애은당은 거북형으로 축조돼 앞발 위치에 각각 별당과 방앗간을 두었고 머리 부분에 속하는 앞면에 잠실(蠶室)이 있었으며 꼬리 부분에 화장실이 있다. 정면 사랑채와 붙은 대문을 들어서면 5칸 곡자형(曲字型)의 안채가 자리하며 좌측에는 창고와 방이 딸린 부속사(고채) 등이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정면 4칸 반, 측면 3칸 반이며,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목조가옥이다.

◆숲에 감싸인 용계정

덕동마을 앞을 흐르는 용계 계곡에서 이름을 따온 용계정(龍溪亭)은 정문부의 별장으로, 조선 명종 원년(1546년)에 건립, 숙종 12년(1686년)에 증축했다. 정조 이후에는 세덕사(世德祠)의 부속건물인 강당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고종 5년(1868년) 서원 철폐 시에 용계정을 세덕사지와 분리하기 위해 여강 이씨 집안에서 밤새도록 담을 쌓아 세덕사만 철폐되고 용계정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건물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목조건물이며, 팔작지붕을 5개의 대들보가 받치고 있다. 방 위에는 다락이 지붕과 이어져 있으며 마루 끝에는 난간을 달았고, 부연(浮椽'처마 끝에 덧얹어진 짤막한 서까래)과 난간 천장마루의 기법이 훌륭하다. 건물 앞쪽은 계곡의 기암절벽과 마주하고 있다. 용계정 주위는 수백 년 된 소나무, 은행나무, 향나무, 백일홍 등이 둘러싸고 있는데 모두 여강 이씨 집안에서 가꾸어낸 것이다. 풍수지리상 사당에서 흐르는 물이 바로 내려다보일 경우 복과 재물이 흘러간다고 해서 사우정 고택에 있는 사당과 용계 계곡의 시야를 막기 위해서다. 이 숲은 2006년 산림청과 생명의 숲이 실시한 제7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됐다.

◆시대의 변화상을 알 수 있는 근대 한옥

2008년 2월 28일 등록문화재 373호로 선정된 오덕리 근대한옥은 사우정 고택을 마주 보고 바로 오른쪽에 맞붙어 있다. 현재 사람이 살지 않아 아쉽게도 누가 건축한 것인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상량(上樑'대들보 위에 지붕을 얹는 일) 당시 대들보 위에 새겨진 기록을 통해 1947년 2월에 건축됐다는 것과 여강 이씨 일가에서 지었다는 사실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전통 한옥과 근대 한옥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어 20세기 중반 사회변화에 따른 민가의 변화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가옥이다. 일반적인 형태는 전통 한옥의 특징을 따랐으나, 안마당을 중심으로 집약된 배치 형식, 제재소에서 규격 생산된 목재 사용, 전'후'측퇴(별도의 기둥을 세워 덧붙여 만든 방)가 발달한 평면구성, 수납 공간의 발달 등에서는 근대 한옥의 특징을 읽을 수 있다.

◆덕동민속전시관

용계정 인근에 지어진 덕동민속전시관도 마을을 찾았다면 잊지 말고 들러야 할 곳이다. 도비와 시비 등 3억원의 예산으로 2004년 5월 지어진 전시관은 126㎡ 규모 내부에 2천여 점의 유물들로 가득하다. 여느 전시관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베틀과 그릇 등은 둘째 치더라도 200년이 넘은 사주단자, 마을의 내력을 담은 고문서, 시서화의 대가 표암 강세황이 쓴 세덕사 현판, 1911년 덕동마을을 측량한 도면 등 기록물 400여 점은 방문자를 과거의 그 시절로 안내한다. 무엇보다 용계정을 조사하다 천장에서 발견된 세덕사 관련 문건 등은 역사학적으로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 문건과 함께 문서를 나르던 행랑과 제사 의복 등을 합하면 모두 100여 점에 이른다.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민학회에서는 덕동마을이 과거 부곡(部曲'대장장이 등 특수계층의 사람들이 살았던 지역)이었으며, 사우당이 이들의 지휘소였을 것이라 추정한다. 실제 임진왜란 때 경주성 탈환 전투로 유명한 경주부윤 박의장이 바로 이곳 대장간에서 비격진천뢰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전시관 자료 중 67점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552호로 지정됐다. 도난을 우려해 진본은 별도의 금고에 보관 중이며 대부분 복사본을 전시 중이다. 전시관은 토'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만 문을 연다. 봉사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이동진(82) 관장이 생업에 종사하느라 평일에는 시간을 낼 수 없는 까닭이다. 이 관장은 외부의 지원 없이 수십 년간 마을의 자료를 수집하고 관리한 공적을 인정받아 전시관 건립과 함께 관장 직위에 올랐다. 이 관장의 노력에 힘입어 덕동마을은 지난해 문화재청에서 '명승지 81호'로,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에 의해 '기록사랑마을 제4호'로 지정됐다.

이 관장은 "나도 여강 이씨의 자손으로서 애은당이 나의 큰집이다. 뿌리를 찾아 이 마을에 왔다가 보관을 제대로 못해 사라져가는 선조들의 기록 보관이 아쉬워 자료를 수집하게 됐다"면서 "내가 은퇴를 하게 되면 이 자료들을 관리할 사람이 없어질까 두렵다. 선대와 후대가 이어질 수 있도록 옛 기록들이 꾸준히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포항'신동우기자 sdw@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