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최북단의 봉화는 낙동강의 요람이다. 낙동강은 봉화를 거치면서 강의 위용을 갖춘다. 봉화 지역을 흐르는 동안 송정리천, 석포리천, 회룡천, 현동천, 가천, 재산천, 도천, 운곡천 등 여러 하천의 물을 받아들인 뒤 비로소 '낙동강'이 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에서 발원한 황지천과 봉화군 춘양면 구룡산에서 흘러온 운곡천이 만나는 곳에 '낙동강시발점공원'(봉화 명호면)이 조성됐다. 낙동강 1천300리 여정은 봉화를 거쳐 영남의 대지를 두루 적신 뒤 경남 김해를 지나 부산 바다에서 끝이 난다.
◆낙동강과 퇴계 이황의 '녀던 길'
1일 봉화군 명호면 관창리. 낙동강은 청량산을 감싸고 흘렀다. 강가엔 늦겨울의 잔설(殘雪)이 남아있었고 옥빛의 강물은 천천히 남하했다. 강변을 따라 오솔길이 이어졌고 마중 나온 듯 소나무 군락이 자리 잡았다. 뾰족한 솔잎들이 찬바람에 흔들리며 솔향을 털어냈다. 은은한 소나무 그늘 아래서 오솔길은 순한 경사를 그리며 이어졌다. 이 청량산 강변길은 북한강 강변길, 섬진강 강변길과 함께 한국 3대 강변길로 불리며 낙동강에서 으뜸가는 경치를 자랑한다.
안동 도산에서 봉화 청량산까지 낙동강을 따라 형성된 이 길은 예로부터 '녀던 길'(예던 길)로 불렸는데 사연은 4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64년 4월 어느 날 예순 셋의 퇴계 이황은 생애 마지막 산행에 나섰다. 제자 10여 명이 동행했다. 퇴계는 낙동강을 따라 걸으며 청량산으로 향했다. 그것은 가르침의 연장이었다. 퇴계는 강변 걷기와 '산을 즐긴다'는 유산(遊山)을 통해 학문의 길을 보여주고자 했다. 퇴계는 어려서부터 숙부 이우와 형을 따라 청량산을 오가며 학문의 기틀을 다졌다.
정민호 청량산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녀던 길'은 원래 '가던 길', '다니던 길'이란 뜻의 우리나라 고유어로 퇴계가 지은 '도산십이곡'에 종종 등장하면서 유학자들 사이에 알려졌다"며 "이러한 이유로 퇴계를 흠모하던 유학자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성지 순례하듯 낙동강 강변길을 '녀던 길'이라 부르며 따라 걸었다"고 설명했다.
◆복원되는 강변길, 살아나는 이야기
조선 최고의 유학자 퇴계 이황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녀던 길'이 되살아나고 있다. 봉화군은 2009년 10여억원을 들여 명호면 북곡리 낙동강변 일대에 경관 숲을 조성했다. 이에 더해 '세계유교선비문화공원' 조성의 일환으로 '선비산수 탐방로'를 2014년까지 완공할 예정이다. 청량산 탐방로 40.7㎞와 퇴계 이황, 공민왕과 노국공주 등 옛 이야기를 테마로 한 낙동강 강변길 10.7㎞로 구성된다.
복원되는 강변길과 함께 낙동강 곳곳에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낙동강이 지나는 소천면 화장산 일대에는 임란의병전적지가 있다. 1592년 유종개가 이끄는 향토의병 600여 명은 영남내륙으로 침투하는 왜병 부대와 격전을 벌이다 모두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를 기리기 위해 광해군은 왕명으로 충신각(상운면 문촌리)을 세웠고 이는 아직도 남아 있다.
하류로 더 내려오면 범바위 전망대가 나온다. 조선 고종 때 송암(松巖) 강영달이 한양 길을 다녀오다 범(호랑이)을 만났는데 양팔을 이용해 범을 잡고 난 뒤부터 마을 사람들이 범바위라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낙동강이 봉화에서 안동으로 넘어가는 곳에 '지붕 없는 천연 박물관'으로 불리는 청량산이 있다. 청량산은 산세가 크지 않으나 연이어 솟은 12봉우리와 기암절벽이 어우러져 소금강으로 꼽힐 만큼 수려한 경관을 지녔다.
소수서원의 전신인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은 1544년 청량산 최초의 기행문인 '유청량산록'에서 "단정하고 엄숙하며 상쾌하고 경개(景槪)한 산으로는 비록 규모는 작지만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산이 청량산이다"고 감탄했다.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청량사가 있다. 본전인 유리보전의 현판은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청량사 인근에 청량정사가 남아있는데 이는 퇴계가 공부하던 자리로 후학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지었다. 퇴계 이후 수많은 선비들이 청량산을 찾았고, 이들은 100여 편의 유람록과 1천여 수의 시를 남겼다.
청량산은 구한말 안동지역 유림들의 의병활동 거점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유학의 성지라는 상징적인 의미와 예로부터 군사적 요새로 기능했던 지형적인 요인이 의병활동의 충분한 조건이 됐다.
◆자연이 준 선물 보따리
낙동강과 함께 봉화는 산과 숲의 고장이다. 봉화에는 선달산, 옥돌봉, 구룡산 등 1천m를 훌쩍 넘긴 명산이 13곳이나 되고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온 고봉(高峰)과 계곡들이 곳곳에 보전돼 있다. 전체면적의 83%가 임야로 이루어져 있고 산림면적 중 30%를 춘양목(금강송)이 차지하고 있다. 춘양목은 궁궐을 지을 때 사용했을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특히 서벽리 춘양목숲(101ha)은 봉화에서도 최고의 삼림욕장으로 손꼽힌다.
봉화군은 산과 숲이 잘 보전됐다는 장점을 살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을 유치했다. 수목원은 국비 2천515억원이 투입돼 춘양면 서벽리 일대에 아시아 최대 규모(5천179ha)로 들어선다. 올해부터 본격 조성에 들어가 2014년에 문을 열 예정이다. 국립수목원으로선 경기도 광릉수목원에 이어 두 번째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공존
명호면 관창리에서 만난 김두한 (51)'이영희(53) 씨 귀농 부부는 "'욕심 때문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는 우화' 같은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며 "자연환경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무분별하게 개발되면 봉화의 중요한 자산인 '자연'이 파괴될 수 있다"고 입을 모아 걱정했다.
봉화군은 백두대간 에코비즈니스 벨트, 녹색문화 생태관광기반 조성, 지속 가능한 자연환경 보전 관리 등을 지표로 내세우며 '조화로운 발전'을 과제를 제시했다. 자연과 인간, 보전과 개발, 사이에서 얼마만큼 '균형' 있는 발전을 하느냐가 숙제로 남아 있다.
전체에 흩어져 있는 관광자원들을 어떻게 연계할 것인가도 고민해야 한다. 봉화군의 면적은 1천201㎢로 서울시의 2배에 달한다. 넓은 면적으로 인해 군 내 주요한 관광자원들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고택과 누각, 천연계곡, 자연휴양림, 낙동강 유원지, 곧 들어설 국립수목원 등을 모두 둘러보려면 하루로는 모자란다. 문제는 숙박시설 또한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동수 대구경북연구원 지역개발팀장은 선택과 집중을 통한 '에코 리노베이션(생태 혁신)'을 강조했다. 이 팀장은 "청정자연을 유지하는 것이 봉화의 가장 큰 자산이기 때문에 개발지구와 보호구역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며 "개발 가능한 곳은 지역에서 필요로 하는 시설을 조성하고 보전해야할 곳은 더 강력한 보호 정책을 펼치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특히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개장에 발맞춰 리조트, 공공숙박시설 등의 주거지구를 하루빨리 조성해야 한다"며 "높이 쌓아올린 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라 자연과 어우러진 저층의 자연친화적 주거지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서광호기자 kozm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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