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침묵, 자기기만, 위선

굴라그(Gulag). 구 소련의 '교정을 위한 노동수용소의 행정본부'의 약어로 강제노동수용소를 말한다. 1929년 농업 집단화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 수용소는 수많은 '계급의 적'들이 생물학적 연명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하에서 노예노동에 자신의 몸을 서서히 연소시킨 지옥이었다.

그러나 동시대의 서구 '강남 좌파'들은 정반대로 묘사했다. 1947년 북한 방문 기행을 쓴 바 있는 미국 여기자 안나 루이스 스트롱은 "노동수용소는 수만 명을 교화시킨 장소로 소련 전역에서 평판이 높다. 인간을 개조하는 소비에트의 방식은 매우 유명하고 효과적이다. 그래서 이제 범죄자들은 종종 수용소를 지원하기도 한다"고 했다. 조지 버나드 쇼도 이런 찬양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영국에서는 누구나 인간으로 교도소에 들어가 범죄자가 되어 교도소를 나오지만 러시아에서는 범죄자로 교도소에 들어가 정상인이 되어 나오곤 한다. 그러나 나오도록 설득하는 게 쉽지 않다. 내가 아는 한 그들은 원하는 만큼 머무를 수 있다."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자 시드니 웹과 비어트리스 웹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KGB의 전신인 연방국가정치보안부(OGPU)의 채찍질로 건설된 백해(白海) 운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OGPU는 대규모 공사를 무사히 끝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갱생이라는 목표를 성공리에 끝마쳤다는 점에서 큰일을 해냈다." 이 운하는 17만 명의 '죄수'가 삽과 곡괭이, 손수레만으로 판 것이며 그 과정에서 2만 5천 명이 희생됐다.

이 같은 굴라그의 참상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군도' '암 병동' 등 솔제니친의 연작들이 발표되기 전까지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완전한 비밀은 아니었다. 구사일생으로 굴라그에서 살아남아 서구로 탈출한 '계급의 적'들의 증언이 있었고, 소련의 실상을 폭로한 앙드레 지드의 '소련 기행'도 있었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구의 좌파들은 귀와 눈을 닫았다. 왜 그랬을까. 자본주의를 끝장낼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종교의 진실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럴 리 없어!" 이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속고 싶어했던 것이다.

이런 자기기만은 지금 이 땅에서도 재연되고 있다. 바로 중국의 탈북자 강제 북송에 대한 좌파들의 침묵이다. 강제 북송 반대 시위가 열리고 있는 중국 대사관 앞에 좌파의 모습은 눈 씻고 봐도 없다. 천성산 도롱뇽의 운명에도 측은지심-그러나 기우(杞憂)였다-을 발휘했던 그들이다. 그래서 "탈북자의 목숨이 도롱뇽보다 못하냐"는 탈북자의 절규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좌파들의 이 같은 침묵은 국제사회가 우리에게 너희는 무엇을 했느냐고 묻게 한다. 여당이 제안한 탈북자 청문회는 열리지 못하고 있다. 민주통합당은 "탈북자 북송 반대 결의안으로 된 것 아니냐"며 발을 빼고 있고 통합진보당도 "18대 국회는 사실상 종료된 것 아니냐"며 거부했다. 자기 나라 국민의 일도 아닌데 미국이나 유럽연합(EU), 캐나다, 영국 의회가 1, 2년에 한 번씩 여는 게 탈북자 청문회다. 그뿐만 아니다. 북한인권법은 민주당의 반대로 8년째 제정이 가로막혀 있다. 그 사이 미국은 2004년 북한인권법을 제정했고 일본도 2006년 비슷한 법을 만들었다. 부끄러운 일이다.

더 부끄러운 것은 침묵의 이유로 내세우는 '현실론'이다. 그 논리는 대략 이렇다. 북중 관계에 비춰 중국이 탈북자를 강제 북송해도 이를 막을 뾰족한 방법이 없고, 둘째 정치적 난민과 생계형 탈북자가 혼재되어 있어 구분하기 쉽지 않으며, 셋째 강제 북송 반대 시위가 중국을 자극해 한중 관계를 더욱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여러 말 하고 있지만 결론은 탈북자 강제 송환은 현재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덮어둬야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변명이다. 그렇게 하면 중국이 대오각성해 강제 북송을 중단이라도 한다는 말인가.

인간에게는 냉철한 머리만큼 뜨거운 가슴도 중요하다. 지금 탈북자 문제는 바로 뜨거운 가슴을 요구하고 있다. 뜨거운 가슴이 없이 냉철한 머리만으로는 현실론이라는 자기기만의 함정에 빠진다. 지금 좌파의 침묵은 과연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위한 침묵인가. 그것은 진보의 가치를 훼손하고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하는 위선이다.

鄭敬勳/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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