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당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합천 해인사 홍제암(弘濟庵)을 찾았다. 홍제암을 찾은 날은 봄을 재촉하는 비가 촉촉하게 내렸다. 사명대사가 1608년 궁에서 나와 이곳에서 3년을 지내다 열반한 곳이다. 홍제암에는 사명대사의 영정과 '홍길동'의 저자인 허균이 쓴 석장비와 부도탑 등 발자취가 남아 있다. 사명대사의 영정은 휴정(休靜), 영규(靈珪) 등 임란 때 공을 세운 스님 영정과 함께 '영자전'(影子殿)에 모셔져 있다. 홍제암에서 해인사 본절로 난 문을 나서면 열을 지어 늘어선 부도탑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중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사명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석장비(石藏碑)다. 석장비는 네 조각 난 것을 붙여서 다시 세웠다. 일제강점기에 경찰서장이 부숴 묻어 놓은 것을 1959년에 다시 붙여 원래의 자리에 세웠다.
허균이 쓴 비문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과 사명의 대화 중에 "조선에 보배가 있습니까" 하는 청정의 물음에 "조선에는 보배가 없고 보배는 일본에 있습니다"라고 사명이 답하자, 청정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반문한다. 이에 사명이 "현재 조선에서는 당신의 머리를 보배로 보기 때문에 보배가 일본에 있다"고 답했다고 기록한다. 이처럼 석장비에 배일사상이 내재(內在)돼 있다는 구실로 당시 합천경찰서장이 주동이 되어 비석을 십자로 네 동강 내 묻어버렸다. 당시 주지와 사명당의 영정도 경찰서 유치장에 구류(拘留)시켰다. 서장은 이 공로로 통영경찰서장으로 영전됐으나 7일 만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해인사지(海印寺誌) 등에 전한다. 부도탑은 석장비 옆에서 오솔길을 따라 20여m 오르면 있다. 2m 높이의 부도탑에는 아무런 표식이나 안내판도 없다. 하지만 간결해 품위가 있고 주변 경관이 좋다. 부도탑을 대하면 경건한 마음으로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길을 안내해 준 본해 스님은 "사명 스님이 계실 때는 홍제암은 없었고 스님께서 조그만 초당(草堂)을 짓고 계시다가 스님 열반 4년 뒤 제자인 혜규 스님이 홍제암을 지었다"며 "몇 차례 중수를 거듭하고 1977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참배차 들러 구국성사의 얼이 깃든 곳이니 일시에 보수토록 하라고 지시해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됐다"고 말한다.
홍제암 종성 큰스님은 "사명 스님 입적 후 유물이 해인사에 있었다. 태허 스님이 도총섭으로 계시면서 합천이 "俠'(협)자의 지명도 그렇고 이곳이 귀양지에다 반란이 일어난 곳 등으로 사명대사의 유품이 있을 곳이 못 된다 하여 표충사로 유물 대부분을 가져갔다"며 "그래서 이곳에는 영정과 몇몇 유품만 겨우 남게 됐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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