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은 왕!' 시장경제가 발달하고 서비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고객은 절대적 존재로 군림하고 있다. 비슷한 질과 서비스의 상품이 쏟아지면서 기업들은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고객들의 다양한 요구는 물론이고 무리한 횡포까지도 받아들이는 수준에 이른 것.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점을 악용해 도를 넘어서는 요구를 하는 '블랙컨슈머'가 늘어나면서 소비자들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지적도 터져 나오고 있다. 일부 몰상식한 고객들의 행태에 선량한 다수의 고객이 피해를 보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단 큰소리부터!
지난달 대구의 한 백화점 매장을 방문한 A씨. 그는 구매를 원하는 브랜드 매장을 찾지 못하자 직원에게 매장을 문의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직원이 실수로 다른 층을 안내했다. 이에 A씨는 "직원 실수로 바쁜 시간을 허비했으니 금전적으로 보상하라"고 요구했다. 백화점 관계자는 "근무 경험이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신입 직원이다 보니 실수가 있었다고 숍매니저와 해당 매장 관리자가 사과했지만 A씨는 수긍하지 못하고 '말로만 사과를 하느냐'며 금전적 보상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화장품 매장에서 제품을 구매한 B씨는 구매한 지 20일 후 매장을 찾아 "내 피부와 맞지 않는다"며 환불을 요구했다. 제품은 전체 용량 중 3분의 2를 사용한 상태였다. 직원이 "이미 너무 많은 양을 사용했기 때문에 환불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지만 그는 오히려 "피부 트러블도 생겼으니 환불은 물론이고 피해 보상까지 하라"고 언성을 높였다. 나중에 백화점 측이 확인 결과, B씨는 상습적으로 환불과 보상 등 부당한 요구를 일삼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또 다른 백화점에서는 더욱 황당한 고객도 있다. 일정 금액의 화장품을 구매하면 특정 샘플을 증정한다는 행사 전단을 보고 매장을 방문한 C씨. 그는 "일단 샘플을 주면 나중에 해당 금액만큼의 화장품을 구매하겠다"며 샘플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너무나 뻔뻔한 요구에 당황한 직원은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설명했지만 C씨는 샘플을 제공할 때까지 매장에서 소란을 피워 결국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다.
인격적인 모욕을 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D씨가 나타나면 일단 매장 직원들은 경계한다. 그는 백화점을 내집처럼 자주 드나드는 우수고객이지만 매장을 방문할 때마다 직원들의 행동을 문제 삼으며 "직원들의 정신상태를 뜯어고쳐야 한다. 근무 태도가 심각하니 앞으로 어떻게 개선할지 알려달라"고 요구하는 등 과격한 표현을 내뱉는 것.
백화점 관계자는 "아무리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더라도 매장에서 소란이 벌어지면 백화점 이미지를 실추시키게 되다 보니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객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며 "이런 점을 악용해 상습적으로 불만을 제기하고 환불이나 보상을 요구하는 고객들도 상당수"라고 밝혔다.
◆고의'상습적 악성민원인
블랙컨슈머란 악성을 뜻하는 블랙(black)과 소비자를 뜻하는 컨슈머(consumer)의 합성신조어. 고의적, 상습적으로 악성민원을 제기하는 소비자를 말한다. 이들은 큰소리를 내는 등 일반 소비자들에게도 비합리적인 공포감과 불안감을 심어줘 해당 업체에서 구매를 기피하게 만든다. 특히 극성스러운 블랙컨슈머로 인해 곤욕을 치르는 곳이 바로 백화점 등 유통업체와 외식업체들이다. 음식의 경우에는 특히 "신선한 재료를 쓰지 않았다" "위생이 불량하다" 등의 소문이 퍼져 나가면 기업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다 보니 '생트집'이라 할지라도 원하는 보상을 해 줄 수밖에 없는 것.
프랜차이즈 외식업체 관계자는 "최근 인터넷이나 SNS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부당한 요구를 하는 블랙컨슈머가 더욱 증가했다"며 "한쪽의 일방적인 주장이라 할지라도 급격히 확산되는 데다, 이런 요구를 했는데 들어주더라는 성공사례(?)도 인터넷으로 공유되면서 과도한 요구를 하는 고객들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최근 문제가 됐던 채선당 사건 역시 한쪽의 일방적인 주장이 SNS를 통해 급격히 확산되면서 브랜드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CCTV 확인을 통해 사태가 반전됐다.
식당을 운영하는 박모(48) 씨도 최근 매장과 주차장 내부 곳곳에 CCTV를 추가로 설치했다. 주차장에서 사고가 생겼다며 보상을 요구하는 고객이 있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CCTV를 확인한 결과 거짓말로 드러난 것. 박 씨는 "외제차를 타는 고객이었는데 다른 곳에서 긁힌 것을 식당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수리를 요구했다"며 "음식에서 이물질이 나왔다며 식비를 내지 않으려는 고객들도 종종 있었던 터라 이번 기회에 CCTV를 6대로 늘렸다"고 했다.
심지어는 스마트폰을 교환 혹은 환불받기 위해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1년 안에 고장나면 환불해주는 약관을 노린 것. 보조금을 받고 휴대폰을 구매한 뒤 환불을 받을 경우 단말기 정가대로 받을 수 있어 차익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한모(36) 씨는 전자레인지에 휴대폰을 넣고 돌린 뒤 환불을 받으려다 경찰에 불구속 입건됐다. 보조금을 받은 휴대폰을 일반적인 사용 중 고장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 확인되는 것을 수상히 여긴 제조업체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정밀조사를 의뢰하면서 덜미가 잡혔다.
◆결국 선량한 소비자에게 피해로 전가
지난해 하반기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기업 314개사를 대상으로 '블랙컨슈머로 인한 기업피해 현황과 대응과제'를 조사한 결과, 83.4%에 달하는 기업들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거나 논리적으로도 지나친 고객들의 요구, 이른바 블랙컨슈머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기업들이 꼽은 고객들의 부당요구 유형(복수응답)으로는 '적정수준을 넘은 과도한 보상요구'가 57.9%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규정에 없는 환불'교체 요구'(35.2%), '보증기한 지난 후의 무상수리 요구'(6.5%)가 뒤를 이었다. 소비자들의 부당한 요구에 대응하며 겪는 애로사항으로는 '인터넷'언론 유포 위협'(71.0%)을 가장 많이 지적했고, 이어 '폭언'(39.7%), '고소'고발 위협'(17.6%), '업무에 방해될 정도의 연락과 방문'(16.8%) 순이었다.
고객의 부당한 요구를 수용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71.7%의 기업이 '수용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는 '기업 이미지를 훼손할까 우려해서'(79.8%)라고 응답했다. 실제 조사기업의 50.4%는 '인터넷의 악성 비방이나 사실과 다른 언론보도로 인해 기업 이미지 훼손과 제품판매 감소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업이 블랙컨슈머들에게 이용당할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다른 소비자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 즉 블랙컨슈머로 인한 비용을 제품가격에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백화점 컴플레인 담당자는 "블랙컨슈머의 증가는 기업의 소비자 불만 서비스 비용을 과도하게 집행하게 해 결국 개별 소비자에 대한 서비스 질을 낮추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블랙컨슈머가 늘어나면 정당한 이유로 불만을 제기하는 소비자들도 블랙컨슈머로 오인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피해는 더욱 크다. 경쟁업체의 영업을 방해하기 위해 일부러 빵에 죽은 쥐를 넣고 사진을 찍은 뒤 인터넷에 올려 모두를 경악하게 했던 '쥐 식빵 사건' 악성 블랙컨슈머 사례가 사회적 화제가 되면서 음식물에서 이물질이 발견된 사건의 경우 오히려 소비자가 오해를 받는 일도 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에 따르면 "2010년 접수된 이물과 관련된 소비자 신고건수는 모두 9천882건에 달하지만 소비나 유통 단계에서 이물이 들어간 경우를 보면 전체 이물 신고 건수의 65%가량이 제조업체의 책임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고 말했다. 어디서 이물질이 혼입됐는지 오리무중인데다 이를 악용하는 블랙컨슈머까지 문제가 되다 보니 선량한 소비자들까지 피해를 보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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