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해묵은 나의 염주다. 녹슬지 않는 '화두'요 프레이즈의 황금가지로 영혼을 흔드는 신화다. 잘 익은 청주 맛으로 나를 취하게 하고 눈썹 고운 초승달같이 신선한 이미지다.
대숲을 흔들며 기척 없이 사라지는 장자의 바람 소리요, 담장 없는 우리 마당을 기웃거리며 흘러가던 노자의 시냇물이다. 언젠가 동구 밖을 지키다 왼쪽 어깨가 무너진 고목이 불편한 몸짓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말없이 안았더니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경산군 고산면 연호동이 지금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연호동으로 바뀌었고 고향 풍경은 세월의 무게만큼 흑백사진으로 퇴색해 있었다. 그곳에는 망초꽃 나의 유년이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다.
동네 신작로에는 소달구지들이 다녔고 서둘지도 않았으니 이른 봄 아지랑이처럼 평화로운 소품들이었다. 이마를 맞대고 사는 사람도 그랬다. 두엄 냄새도, 뚝배기 같은 사투리도 나팔꽃처럼 엉겨 있었다.
대덕산은 아직도 병풍처럼 서 있고 솔숲에 숨겨져 있는 안마을과 연못은 변함없는 내 마음속의 정물화다. 반쯤 허물어진 낮달처럼 얼비치는 유년의 추억들도 허공을 떠돌며 바람이 되고 있다.
내 고향 연호동은 제갈(諸葛)가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안마을 연못을 중심으로 늘어선 집들 중 약 50여 호가 모두 일가들이다.
외지로 나가면서 희성이란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런 성씨도 있느냐는 뜬금없는 물음에 황당할 때도 있었다. 전화를 받고 내 긴 이름을 대면 '뭐요?'하기 일쑤다. 내 이름이라고 하면 이번에는 '농담하지 마세요' 한다. 그래서 '이름수난'이란 시도 썼다.
'자(字)짓고 호(號)짓고 아명 짓고 택호 따로/ 사람 이름 소중하던 시절이 있었으니// 어느 국회의원 세련된 연하장엔 도갈태일, 자유시인 증정시집엔 제갈태, 시조문학 목차에는 비갈태일, 혀 꼬부라진 소주잔 건너 주며 갈 선생, 오늘 받은 시집엔 태일 님, 연간집 이름난엔 끝 자가 달아나고, 동사무소 여직원은 갈태씨, 아무렴 어떤가? 썰물 같은 세상// 오늘은 후레자식 거동같이/ 비실비실 가을비가 온다.'
고산국민학교 3학년 때 6'25가 터졌다. 어릴 때의 고향을 떠올리면 가장 강렬하게 각인된 잔상은 밀려오는 피란민과 총소리다.
책보를 허리에 매고 산을 넘다가도 콩을 볶는 듯한 따발총 소리가 들리면 엉덩이는 다 드러낸 채 다복솔 밑으로 숨었다. 동심이란 말도 그때는 사치였으며 마음속의 풍금 소리는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없었다.
낙동강 전투가 피비린내로 얼룩진 격전지였으나 다행히 우리는 피란은 가지 않았다. 남부여대로 끊임없이 밀려든 피란민들은 우리 집 마당에서 헛간까지 초만원을 이루며 잔칫집처럼 붐볐다.
장독대는 열어두었고 보리밥도 나누어 먹었다. 우리도 피란길을 떠나면 같은 신세라는 생각에 경상도 인심은 낯을 가리지 않았다.
초등학교는 국군들의 야전병원으로 내주고 아이들은 동네 재실이나 향교 같은 곳에서 공부했다. 점호가 끝나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는다'는 살벌한 군가를 불렀다. 휴전이 되자 고사리손으로 벽돌을 찍었고 가마니를 깐 교실에 앉아 구구단을 외웠으니 꿈만 같다.
고등학교 때의 기억도 생생하다. 문학을 하겠다고 아버지께 여쭈었더니 '당장 집어치우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우기다가 문학 관련 책들이 모두 마당에서 분서갱유(?)되었다.
당신의 죽마고우가 왜정시절 소설가였던 피해의식 때문이란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그렇게 만류했지만 시조시인이 되었고 신문사 편집위원으로 '아침시론'을 쓰고 있다. 학교 교장을 정년퇴직하고 포스코교육재단 이사로 있다. '한문화' 연구회를 창립해 TV 강의도 한다.
40년 만에 돌아와 경산문인협회를 맡아 고향 문우들과 정담을 나누니 그것 역시 꿈만 같다. 경상북도 문화상(문학)도 받았으니 사주팔자는 어쩔 수 없는 가보다. 그러고 보면 세월이란 게 화살 같다.
고향도 세월을 비껴가지는 못해 리모델링을 해 놓았다. 아니, 어디론가 감쪽같이 훔쳐가 버렸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대구스타디움이 하얀 상아를 내밀며 코끼리처럼 어슬렁거리고 고층 빌딩과 아파트가 시멘트 숲을 이루며 줄지어 서 있는 수성구 고산은 서울의 강남이라 한다.
그중에서도 더욱 낯선 것은 범물동에서 동촌을 잇는 고가도로가 엿가락처럼 걸터앉아 있다. 고향 집은 고가도로에 깔려 흔적없이 압사해버렸고 도시철도가 들어와 연호역이란 간판이 격세지감을 더한다.
그러나 작은 산들이 안아주고 있는 고즈넉한 안마을(안뜸)은 제갈가의 집성촌답게 본래의 모습으로 버티고 있어 안도감을 느낀다. 마음은 수구초심이지만 고향에 와도 이제는 내가 낯선 이방인이다.
작은 산들이 둘러서 연꽃이 만발한 아담한 연못을 안고 있는 것이 연호동의 이미지다. 나의 아호 연주(蓮洲)도 이에 연유한다.
주역에는 산과 연못을 팔괘(八卦)상으로 보아 신성시했다. 서른한 번째 괘가 산이 연못을 안고 있는 택산함(澤山咸)이고 자세를 바꾸어 연못이 산을 보듬고 있는 괘는 산택손(山澤損)으로 마흔한 번째다.
전자는 금슬 좋은 부부가 백년해로하는 상이다.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야산은 넉넉한 지아비의 품이고, 언제나 노송을 거느리고 연꽃을 피우는 연못은 모든 것을 품고 다소곳이 앉았으니 지어미다.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기르자면 속궁합이 좋아야 하니 함(咸)이다.
후자는 금슬 좋은 부부가 만나 수태를 하고 열 달이 지나 아이를 낳는 상이다. 산모가 아이를 덜어내니 손(損)이다. 서른한 번째에서 마흔한 번째의 간격도 열 번(달)째다. 따라서 산과 호수는 만물을 낳는 모태다.
함(咸)은 교감으로 나를 비워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손(損)은 내 것을 덜어내어 상대에게 주는 것이다. 윤택한 못의 기운이 산속의 초목과 금수를 생장활동하게 하니 산택통기(山澤通氣)이다.
역(易)에서 자연은 글자 없는 경전이라 한다. 내 고향 연호는 산과 연못으로 앉아 이런 심오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었다는 것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어깨가 무너진 고목도 온몸으로 경전을 쓰고 있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고향에는 연호정이란 누각이 연못가에 서 있다. 마을에는 폐가도 있고 쑥대머리를 한 잡초들이 빈집을 지키기도 한다. 세월의 잔주름도 깊어 보인다. 동네 한 바퀴를 돌아도 낯익은 얼굴을 만나지 못했다. 긴 담뱃대를 문 고목들만 잔기침하고 있었다. 그나마 토담집 대문에 제갈 아무개란 문패가 정겹다. 나도 언젠가는 고향 산자락에 와 오솔길로 앉을 것이다.
제갈태일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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