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삼성 라이온즈는 2년 연속 5위에 머물며 자존심을 구겼다. 하지만 그해 고졸 연습생 출신 이동수는 기회를 잡았다. 그는 3년간의 무명 설움을 단번에 날리는 대활약으로 팬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신인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대구고를 졸업, 1992년 삼성에 연습생으로 들어온 이동수에게 1군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2군 생활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노력과 맞바꿀 희망이 실낱같다는 것은 지친 몸을 더욱 힘들게 했다.
2군에서는 '정년은 1년, 2년이면 방출'이란 말이 나돌 정도로 팀은 선수에게 많은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에게 눈길이 온건 3년차이던 1994년이었다. 그해 2군 남부리그서 홈런왕과 타점왕에 오르면서 1군의 호출을 받았다. 하지만 6경기(14타수 3안타 1홈런)로는 존재감을 알리는 데 부족했다. 그러나 우용득 감독은 그의 방망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고교 때는 유격수, 프로에선 1루를 봤던 이동수는 1995년 전지훈련서 3루로 수비위치를 바꿨다. 1루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이종두'이정훈'이중화'양준혁이 버티고 있었고 이승엽이 백업으로 뒤를 받치고 있었다.
1995년 이동수는 전년도에 입단한 주전 3루수 김한수가 방위병 복무로 반쪽 선수가 되면서 그 자리를 채웠고, 3년 인고의 세월은 마지막 투혼을 발휘하게 했다.
5월 9일 이동수는 쌍방울전에서 역전 결승 홈런포를 작렬했다. 그날은 난생처음 규정타석을 채운 날이었다. 이어 두 달여가 지난 7월 25일 이동수는 자신을 감쌌던 두꺼운 껍질을 깨고 화려한 '백조'로 큰 날개를 펴는 운명의 순간을 맞게 됐다.
그날 대구서 벌어진 한화전에서 4번 타자로 나선 이동수는 삼성이 3대6으로 뒤진 9회, 스코어를 보면서 짐을 싸려 했다. 그러나 노아웃 만루 찬스가 만들어졌다. 2번 타석에 대타로 들어선 신동주가 친 볼이 1루수 직선타구에 걸리며 병살타가 됐다. 2사 2, 3루 타석에는 양준혁이 들어섰고, 침착하게 공을 골라내며 다시 베이스를 꽉 채웠다.
마운드에는 불을 끄러 나온 최고의 소방수 구대성이 서 있었다. 이동수는 뚜벅뚜벅 곰같이 타석이 들어섰다. 관중은 '설마'와 '제발'이란 단어를 가슴 속에 새긴 채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구대성이 던진 초구에 이동수의 방망이가 돌아갔다. 딱 하고 공이 맞는 순간, 관중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공의 궤적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공은 펜스 너머에 꽂혔다. 9회말 역전 만루 홈런. 역전 끝내기 홈런은 역대 4번째였고, 그것이 만루 홈런이 된 건 프로 출범 후 첫 번째였다. (역전 끝내기 홈런 ①1982년 10월 14일 MBC 최정기-삼성전 성낙수 상대 2점짜리 2대1 ②1986년 4월 6일 청보 양승관-빙그레 한희민 상대 3점짜리 9대8 ③1994년 4월 17일 쌍방울 김충민-삼성 오봉옥 상대 3점짜리 6대5)
이동수는 "당시 빠른 공을 노리고 있었는데, 마침 몸쪽으로 낮은 코스의 직구가 들어왔다. 공이 맞는 순간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는 흥분해 기억이 잘 안 났지만, 그 다음 날부터 지금까지도 그때의 짜릿한 손맛은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동수는 그해 125경기에 출전해 121개의 안타(타율 0.288)와 22개의 홈런을 터뜨리며 81타점을 엮어냈다. 홈런은 OB 김상호(25개)에 이은 2위였다.
맹활약 덕분에 신인왕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입단 4년차였지만 한국야구위원회의 규칙에 타자 경우 5년 이내 60타석을 넘기지 않으면 신인으로 취급해 준다는 문구가 있었다.
경쟁자는 롯데의 마해영(타율 0.275'18홈런'87타점). 1994년 실업리그 최우수선수며 국가대표 거포 출신의 마해영은 1995년 계약금 1억8천만원, 연봉 2천만원 등 몸값만 2억원에 이르는 예비스타였다. 계약금 800만원, 연봉 900만원을 받고 입단한 이동수와는 격이 다른 선수였지만, 이동수는 신인왕 투표서 1위 40표를 받아 480대310으로 여유 있게 마해영을 제쳤다. 1993년 양준혁에 이어 삼성 선수로는 두 번째로 신인왕을 거머쥐며 내년을 기약했던 이동수는 그러나 김한수의 복귀와 정경배의 입단으로 다시 벤치를 지키는 때가 많아졌다.
1997년에는 롯데로, 1998년에는 쌍방울로, 2001년에는 KIA로, 2003년에는 시즌 중 두산으로 트레이드된 이동수는 그해 그라운드를 떠났다. 팬들은 그를 '불운의 중고 신인'이라 불렀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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