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교열단상] 배려하는 마음

급속한 과학의 발달과 현대화로 개인주의와 상대주의, 물질주의가 우리의 삶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 있다. 개인주의는 자신을 절대화함으로써 사람들과 나누는 친교와 사랑의 공간을 앗아 갔고, 상대주의는 가치와 의미의 상실을 가져왔다. 물질주의는 인간을 끝없는 탐욕과 쾌락으로 이끌고 급기야는 인간을 돈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

이처럼 날마다 욕심, 쾌락, 돈의 유혹 속에서 살아가다 보니 우리의 생활 현장은 온갖 유혹과 싸우는 전쟁터와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러다 동고동락하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돈 버는 기계로밖에 여기지 않아 시원찮은 돈벌이가 상대에게 약점으로 작용하는 세상이 오지 말란 법도 없으리라.

"시원찮은 국에 입 덴다."는 대단하지 아니한 일에 해를 당함을, "시원찮은 귀신이 사람 잡아간다."는 변변하지 못하고 미련해 보이는 사람이 도리어 큰일을 저지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속담이다.

'시원찮다'는 '시원하지 아니하다'가 줄어서 된 말로 마음에 흡족하지 아니하다, 몸의 일부가 좀 건강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시원찮다'의 준말은 '신찮다'가 아닌 '션찮다'로 "징소리가 왜 저렇게 션찮아?" "몸도 션찮은 것이 낳아도 하필 빼빼 마른 봄에 애기를 낳는구나."로 쓰인다.

"그는 아내에게 쥐여산다." "그는 아내에게 쥐여 산다." "그녀는 남편에게 쥐어산다." 앞에 열거된 문장에서 올바른 것은 "그는 아내에게 쥐여산다."이다. '쥐여산다'는 다른 사람에게 억눌리어 기를 펴지 못하고 산다는 뜻으로 준말은 '줴살다'이다.

'쥐여 주다'와 '쥐어 주다'를 구분해보자. '쥐여'는 '쥐이어'의 준말로 '쥐이다', '쥐어'는 '쥐다'의 활용형이다. '쥐이다'는 '주다'가 보조 용언인 경우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쥐이다(쥐게 하다)'의 문형으로 쓰이어 "내가 그에게 사탕을 쥐여 주었다." "그가 나에게 돈을 쥐여 주었다."로 쓰인다. '쥐다'는 '주다'가 본용언인 경우 '누가 무엇을 쥐다'의 문형으로 쓰이어 "내가 사탕을 쥐어, 그에게 주었다." "그가 사탕을 쥐어 나에게 주었다."로 쓰인다. '쥐다'는 '쥐어서'로 쓸 수 있고 '쥐이다'는 '쥐게 해 주었다'로 쓰인다.

사람을 대할 때 사랑으로 바라보는 눈이 중요하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을 가졌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귀를 가졌다. 향기가 나지 않는 곳에서 향기를 맡을 수 있고 손이 없어도 만질 수 있고, 발이 없어도 천 리에 가닿을 수 있다. 사랑을 가진 사람만이 보이지 않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고, 들리지 않는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살다 보면 끊임없이 돈의 유혹을 받을 것이지만 좀 션찮은 남편 또는 아내라도 상대가 쥐여산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배려하는 마음이 사랑이 아닐까.

성병휘/교정부장 sbh12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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