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좋은생각 행복편지] 빚 없는 세입자와 빚쟁이 집주인

저는 앞산 아래 자그마한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친정이 근처에 있어 결혼 직후 바로 이곳에 자리 잡았습니다. 육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좋기도 하지만 어릴 때부터 30년 이상을 살아온 동네라 익숙하고 이웃들도 좋아 이만한 곳이 없다 싶습니다. 번화가와는 거리가 있어 공기도 좋고 조용합니다. 위치상 크게 경기를 타지 않는 곳이라 매매나 전세 시세를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그 덕에 7년 이상 전세로 살면서 '세입자'라는 것을 의식할 일이 거의 없었기도 합니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렇게 시세에 둔감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아등바등 돈을 모으지 못했다 싶기도 합니다.

아무튼 '언제 집을 살 거냐'는 어른들의 성화에도 '요즘 세상에 집에 돈을 많이 투자하거나, 집 때문에 빚을 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며 대답을 일축해 버리곤 했습니다. '실수요보다 집이 많기 때문에 아파트 가격이 오를 리는 없으며 언제든 필요할 때 사면 된다'는 것이 제 생각의 요지이기도 합니다.

요즘 웬만한 아파트 가격은 월급쟁이들이 저축만으로 단기간에 구입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비쌉니다. 내 집 마련 때문에 빚이 많은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은행에 월세를 내고 '은행 사택'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래도 '요즘 대출 없이 집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고 서로 위안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런 이야기조차도 제게는 남의 이야기일 뿐이었습니다.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빚을 내서 무리하게 집을 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도 있습니다.

저금리를 바탕으로 과도한 대출을 받아 집을 마련한 사람들이 아파트 가격 하락과 금리 인상으로 위기에 몰리는 경우를 일컫는 '하우스 푸어' 즉, '집을 소유해서 빈곤한 사람'이라는 신조어도 생겼습니다. 아무튼 저는 '하우스 푸어'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세입자로 무난하게 잘 살아왔습니다. 지난달 '그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 일'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1년 반 전 이야기부터 해야 합니다. 1년 반 전, 그러니까 전세 계약이 만료되기 4개월 전쯤에 집주인이 가족과 함께 해외 연수를 떠나니 전세 기한을 1년 연장해 달라고 부탁해왔습니다. 그때까지는 부모님도, 저희도 어딘가 옮겨갈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지 않았던 터라, 생각 없이 그러겠노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여름, 부모님이 집을 팔고 원거리 아파트로 옮기셨습니다. 육아를 위해서는 당장 따라가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약속된 1년을 지키기로 결정했고 부모님께서도 육아를 도와주시기 위해 먼 거리를 오가는 불편함을 감수하셨습니다.

연말이 되고 1년이 다 가도록 집주인이 아무런 연락을 취해오지 않았기에 하는 수 없이 부모님 집 근처 아파트 몇 곳을 구경만 하며 연말 연초를 보냈습니다. 그러던 2월 중순 무렵 집주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1주일 뒤 귀국할 것인데 집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이사를 계획하고 있으며 귀국하면 다시 연락 달라고 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다시 걸려온 전화에서 급매로 부동산에 집을 내놨고 그 결과 집이 팔렸으니 3월 말까지 집을 비워줄 수 있겠느냐고 이야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당신의 입장을 배려해서 1년 연장을 했고 연락도 미리 해오지 않았던 상황에서 한 달은 너무 급박하다고 이야기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작년에 이사 갔어야 했는데'라는 후회도 소용없었습니다. 결국 몇 차례의 언쟁이 오간 후 집주인이 4월 말까지로 기한을 연장하겠다고 합의선을 제시해 왔습니다.

전세법을 따지고 들면 세입자가 유리한 상황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이런 일련의 과정들에 자존심이 너무 상했습니다. 남의 일인 것으로면 여겼던 '집 없는 설움'이 이런 것인가 싶기도 했습니다. 언제든 내가 필요한 시기에 원하는 집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현실 앞에서는 그저 꿈에 불과한 일이었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분노도 잠시뿐, 당장 이사 갈 집을 구해야 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전세난에 집값 상승기까지 겹쳐 어려움을 겪다가 급한 마음에 덜컥 집을 계약해 버렸습니다. 물론 엄청난 대출을 껴안고 말입니다. '빚 없는 세입자'에서 '빚쟁이 집주인'이 된 것이지요. 어느 쪽이 더 나을지는 앞으로 살아봐야 알 듯합니다. 이 땅의 수많은 '하우스 푸어' 동지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빚을 다 갚고 진정한 집주인이 될 날이 올 것이니 힘을 내자고요.

임언미/대구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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