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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청백리 관안방 추모…대원군 때 헐렸다 복원

솔례마을 이양서원

솔례마을 이양서원
솔례마을 이양서원

솔례마을에는 이양서원이 있다. 이양서원은 곽안방을 주향으로 곽지운, 곽규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숙종 33년(1707) 세운 서원으로,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근래에 면모를 갖췄다.

서원은 강학공간인 강당이 앞에, 제향공간인 사당이 뒤에 위치하는 이른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갖췄다. 지형적 제한에 따른 선택인지 알 수 없지만 이양서원의 배치는 강학 공간 경무당과 사당 청백사가 거의 일(一)자에 가까운 파격적인 설정이다.

곽안방은 세조 때 전공을 세워 공신에 올랐고, 해남현감과 익산군수 등을 역임했다. 수령을 지내면서 남달리 청렴한 벼슬생활로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 곽안방'으로 불렸다.

곽안방은 세종 치세 말기에 무과에 급제한 후 벼슬에 나가 승진을 거듭해 해남현감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청렴한 관리로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세조 때 군공이 인정돼 원종이등훈에 오른다. 그 후 익산군수를 마지막으로 고향 솔례로 돌아와 여생을 보낸다.

군현에 나아가 정사를 펼 때는 엄하고 분명하며, 어질고 용서를 베푸니,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노래하며 숭상했다. 평생 얼음과 옥 같은 처신을 했으며, 임기를 마치고 아무런 재물이나 재산을 소유하지 않은 채 그저 말 한 필에 의지해 돌아오자 고향 백성들이 태수의 행차인 줄 몰랐다고 전해진다.

곽안방이 익산에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한 노비가 열쇠 하나를 차고 오는 것을 보고 놀라며 말했다. "이것 또한 관공서의 물건이니 어찌 작고 큰 것을 논하겠는가. 나를 더럽힐 수 없다"며 바로 돌려보내도록 했다. 이를 두고 주위에서 '현어(懸魚)를 실천한 것과 같다'고 했다. '현어'는 관공서에서 선물받은 고기를 창고에 달아 놓고 떠날 때 가져가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관리의 청렴도를 나타낸다.

서당 내의 건물로는 3칸의 청백사, 6칸의 경렴당, 신문, 읍청루, 4칸의 고사 등이 있다. 청백사에는 곽안방 등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강당인 경렴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읍청루는 대문이며, 고사는 향사 때 제수를 마련해두고 평소에는 창고지기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달성'김성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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