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충한 카키색 티셔츠에 물이 날아간 청색 바지를 입었다. 그 흔한 반지며 귀고리 같은 장신구 하나 갖추지 않았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막 빗어 감아올린 머리 모양,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중년 아줌마 풍이었다. 스물 몇 해 전, 일선에서 선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을 때 만났던 한 학모의 차림새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지극히 평범한 가정주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처음엔 무슨 물건 팔러 온 장사치인 줄로 알았다. 깍듯이 맞지 못하고 건성으로 대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나중에 학생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지인으로부터 그 집이 종업원을 천여 명이나 둔 탄탄한 기업체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스스로의 선입견을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단 나만이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 학모가 백화점을 찾았을 때 판매원 아가씨들이 보인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가씨들은 처음엔 그저 그렇고 그런 고객쯤으로 시큰둥하게 대했다 한다. 잠시 후, 학모가 회사 창립 기념일에 쓸 우산을 주문하는데 그 숫자가 무려 천 개나 되었다. 순간, 아가씨들의 표정이 금세 백팔십도로 바뀌면서 풋보리같이 뻣뻣하던 고개가 실버들처럼 나긋나긋해지더라는 것이다. 예의 지인이 들려준 사연이다. 담임 면담차 찾아온 그 학모는 그렇게 나의 뇌리 깊숙이 특별한 첫인상으로 각인되어 있다.
번드레하게 차려입은 여인과 사귐을 갖던 청년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새롭다. 여인의 겉모습에 끌려 연애 관계를 이어나가던 청년은 결혼을 마음에 두고서 뒤를 캐기 시작한다.
어느 날 청년이 여인의 귀갓길을 밟아 따라갔을 때, 그녀가 당도한 곳은 대궐같이 으리으리한 저택이 아니라 남루하기 짝이 없는 달동네 판잣집이었다. 청년은 넋을 잃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겉모습으로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였으니 그가 받았을 실망감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이 가능한 일 아닌가. 그들의 사귐이 어떻게 귀결되었는지 뒷일은 알 수 없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한 번씩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수레는 빈 것일수록 요란하고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던가. 선인들의 세상살이의 지혜로움에 새삼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살아가다 보노라면 남의 눈을 의식하여 분에 넘치는 사치를 부리고픈 허영심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그 학모는 내게 쓸데없는 겉멋 부리지 말고 알뜰히 속멋을 가꾸라며 따끔하게 일침을 놓는 인생의 의원이 되어주곤 한다.
곽흥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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