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후 대구 한 대학 소강당에 100여 명의 대학생이 모였다. 강당 한쪽에는 신입생들이 긴장된 얼굴로 서 있고, 반대쪽에는 선배 학생들이 바닥에 앉아 신입생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행을 맡은 한 학생이 "차렷, 경례" 구령을 외치자 신입생들은 군대식 경례와 함께 학과 이름을 큰소리로 외쳤다. 테이블 앞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선배 학생들은 "목소리가 커질 때까지 반복하라"고 고함쳤다. 그러자 진행자는 "손뼉을 치며 선배들이 주문한 박수 횟수마다 학과 이름을 반복해 외치고, 만약 틀리면 기합을 주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조금 뒤 이 학과 교수들이 나타나자 신입생들의 표정은 더 얼어붙었다. 교수들의 출현에도 한동안 이 의식은 계속됐다.
신학기를 맞은 대학가에 학생 간 기합이나 폭력이 숙지지 않고 있다. 피해를 당한 학생들은 대책 마련을 호소하고 있지만 대학은 수수방관하고 있다.
대구의 한 4년제 대학에 입학한 김모(19) 양은 최근 신입생환영회에서 선배들이 억지로 권하는 술을 마시다 쓰러져 병원 응급실 신세를 졌다. 문제는 과도한 음주만이 아니었다. 김 양은 "여학생들은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1시간가량 교내를 뛰었고, 남학생들은 땅에 머리를 박고 심한 얼차려를 당했다"고 눈물지었다. 김 양의 어머니는 "딸이 신고식 장기자랑을 준비해야 한다며 1주일간 잠도 제대로 못 잔데다 과도한 음주와 기합으로 쓰러져 분통이 터졌다"고 말했다.
대학 주변 일부 사설 기숙시설은 폭력의 온상이다. 대학생 권모(22) 씨는 최근 학교 주변에 있는 한 종교단체의 기숙시설에 들어갔다가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권 씨는 "간부라고 밝힌 학생들이 신고식을 한다며 기숙시설 건물 옥상에 학생들을 모아 놓고 야구방망이로 엉덩이를 수차례씩 때렸다. 이후에도 각종 군대식 기합을 견딜 수 없어 빠져나왔다"고 했다.
지역 대학들 중 학내 폭력 관련 상담실을 운영하는 곳은 전무하다. 이 때문에 폭행 등의 피해를 입은 대학생들은 초'중'고교생 대상 폭력상담센터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형편이다.
지난해 대학을 졸업한 김동일(28) 씨는 "학년마다 담임선생님 역할을 하는 지도교수가 있지만 수업이나 성적 관련 상담밖에 할 수 없다. 전통적으로 선'후배 기강이 강한 학과는 교수가 학생 관리를 위해 기합이나 폭력을 묵인한다"고 털어놨다.
대구의 한 대학 학생처 관계자는 "학생들 스스로 학생회를 구성해 각종 행사를 여는 데 대해 학교가 섣불리 개입할 수 없다. 하지만 학내 폭력에 대한 징계를 학칙에 명시하는 등 최소한의 대책은 마련돼 있다"고 해명했다.
학교폭력예방센터 김건찬 사무총장은 대학 폭력이 대물림되는 풍토를 바꾸기 위해선 학교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사무총장은 "나이, 학년, 기수 등을 따져 줄 세우고 폭력을 행사하는 풍토가 대학에 만연하다. 이런 악습이 대물림되는 각종 대학 행사에 대한 학교 차원의 점검과 지도가 강화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참교육학부모회 대구지부 김정금 정책실장은 "청소년 보호법에 따르면 청소년은 9세 이상 24세 이하라고 명시돼 있다. 대학생도 보호가 필요한 청소년"이라며 "중'고등학교 폭력처럼 대학 폭력도 사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예방 대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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