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각본 없는 드라마

얼마 전 프로야구 선수 출신의 대학야구팀 감독 R씨와 저녁식사 자리를 가졌다. 지난주 프로야구 경기조작 사건을 수사한 대구지검의 수사 결과 발표가 있었던 터라 식사 자리는 온통 프로야구 경기조작 얘기뿐이었다.

"애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르고 했을 거에요"라며 말문을 연 R감독의 입에선 한숨이 이어졌다. R감독은 1980년대 중'후반 삼성 라이온즈 팬이라면 누구나 아는 에이스 투수다. "흔히들 그런 농담 섞인 말을 많이 해요. 상대팀 잘 아는 투수에게 가서 요즘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까 살살 던져 달라든가, 상대 타자에겐 치지 말고 삼진 먹어달라는 그런 얘기요."

그래도 승부에 불신이 생겨서야 스포츠를 즐기는 묘미가 있겠느냐며 승부조작은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한다고 강조한 그는 어린 후배들이 검은 돈거래에 빠진 원인을 우리나라 학원스포츠 시스템에서 찾았다. 우리나라 스포츠 선수들의 대부분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 이 사태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스포츠 선수들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부터 진학과 프로 진출에만 치중해서 승부에 집착한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독특한 우리나라만의 학원스포츠 시스템이다. 학생이 교실을 뒤로하고 운동장이나 합숙소에서 살다시피 하니 기초적인 인성 교육을 받을 리 만무한 것.

이번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공통적으로 궁금해한 점이 하나 있었다. 수사 과정에서 경기조작 의혹을 받은 프로배구와 프로야구 선수들은 처음엔 똑같이 절대 자기는 잘못한 게 없다며 당당했다. 한 여자 배구선수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혈서라도 써야지 내 말을 믿어줄 건가"라며 결백을 강조했고, 한 야구선수는 검찰 출두 직전 해외 전지훈련에서 돌아오는 공항에서 환한 웃음을 보여 많은 야구팬들을 안심(?)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당당하던 선수들이 검사 방에만 가면 줄줄이 입을 연 것이다. 검사에겐 사람의 마음을 읽는 치명적인 '매직 능력'이 있는 것일까.

R감독 등 스포츠계 여러 관계자의 얘기를 들어봤더니 궁금증은 금세 풀렸다. 선수들이 별 죄의식 없이 승부조작을 장난삼아 하는 바람에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는 잘못한 게 없다고 믿어 떳떳했는데 검사가 증거물을 들이대며 이게 잘못이라고 일깨우니 "그게 잘못이라면 잘못을 저지른 게 맞다"고 자백했다는 얘기다. 지난해 프로축구 승부조작 파문에서도 많은 축구선수들이 똑같은 양상을 보였다.

또 학연과 지연 등에 얽히고설켜 선배가 부탁하면 어쩔 수 없이 들어줘야 하는 우리나라 스포츠계의 잘못된 전통 역시 바꿔야 한다는 게 R감독의 호소다. 실제로 이번 검찰 수사에서 브로커와 전주들은 선수 출신 브로커를 시켜 승부조작에 가담할 선수들을 물색했고, 선수들은 이 선수 출신 선배 브로커의 말을 대부분 들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물론 스포츠 승부조작 파문은 다른 나라에도 있었다. 가장 최근엔 이탈리아 축구에서 발생해 세계 최고 인기 구단이었던 유벤투스가 강등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가까운 이웃인 대만에서도 프로야구에서 감독까지 연루된 승부조작 파문이 일어 야구팀이 절반가량 축소되는 등의 홍역을 겪었다.

하지만 R감독의 얘기처럼 다른 나라와 상황이 다른 점은 우리 스포츠계는 학연과 지연 등으로 얽힌 나머지 브로커가 조금만 시간과 돈을 들인다면 손쉽게 승부조작에 가담할 죄의식 없는 '순진한' 선수들이 많다는 점이다. 단적인 예로 이번 프로야구에서 경기조작에 가담한 것이 드러난 두 투수는 지난해 4, 5월에 열린 경기에서 '검은 볼'을 던졌다. 당시라면 한창 프로축구 승부조작 파문으로 검찰이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던 시기다. 검찰 한 관계자는 "수사 결과, 지난해 중순쯤 프로축구 승부조작 파문으로 다수의 브로커가 구속되는 바람에 프로야구에서의 경기조작 판이 더 커지지는 않았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흔히들 스포츠를 두고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한다. 마지막까지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스포츠는 감동이 있고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스포츠라는 드라마에 승부조작이라는 각본이 들어간다면 스포츠에서 느낄 수 있었던 그 모든 감정들이 사라지고, 스포츠 문화 자체가 무너질 것은 뻔하다.

이번 사태를 거울삼아 스포츠계 내부의 자정 노력은 물론 스포츠 학원 시스템을 '세팅'하는 노력도 병행돼야 할 것이다. 그래야 2002년에 맛봤던 제2, 제3의 월드컵 감동이 탄생할 수 있다.

정욱진기자/사회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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