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좋은생각 행복편지] 칠락팔락(七樂八樂)

공항에서 아들 녀석을 마중했다. 오랜만의 부자 상봉, 찡한 포옹도 할 겨를 없이 아들과 나는 자동차에 올랐다. 아들은 뒷자리에서 기다리던 집사람 옆으로 다가앉았다.

"어머니, 아버지 어떠셔?"

나를 앞에 두고 굳이 제 엄마를 쳐다보면서 나의 안부를 우회하여 묻는다.

"아빠? 여전히 칠락팔락(七落八落)…."

집사람에게 비친 나의 행장일까? 나도 한마디 짧게 응수했다.

"그래, 나는 칠락팔락(七樂八樂), 낙락(樂樂)이다."

버전을 바꿨다. 일곱 번 여덟 번, 늘 즐거이 지낸다는 의미로.

칠락팔락이란 칠령팔락(七零八落)을 말한다. '일곱 떨어지고 여덟 떨어진다' '뿔뿔이 흩어지고 갈피를 잡을 수 없다'거나 '사물이 서로 연락되지 못하고 고르지도 못함' '지리멸렬이 됨'을 의미한다. 사전적 의미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우리는 흔히들 조신하지 못하고 분주하게 싸돌아다니는 행동거지를 두고 '칠락팔락 돌아다닌다'고 한다. 이 말의 뜻은 어디까지나 관찰자의 입장이다.

그런데 생각을 달리하여 행위자의 편에서 고려해보면 어떨까. 행위의 당사자는 보다 동적이고 율동적이며 스스로 기운찬 일상을 누리는 것은 아닐까. 신명난 살림살이를 하는 것은 아닐는지…. 아무렴, 즐겁지 않은 일에 어찌 칠락팔락 분주해 보일 수 있을까.

즐거움(樂)은 기운찬 일상의 근원이다. 즐거우면 그냥 표정이 밝아지고 손이 내뻗친다. 몸이 가벼워지는 법이다. 그래서 선각자들도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보다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또한 즐기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을까. 즐김(樂)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다.

무대 공연을 전공하는 ㅎ교수와 마주 앉았다. 얇게 지져진 정구지 전에서 향이 감돌자 우리 둘의 대화는 일상의 경계를 넘나들 만큼 무르익어갔다. 세간의 이야기로 접어들었다.

그는 변함없는 입심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형님, 형님은 타자기 세대이고 나는 PC세대입니다. 내 아들은 이제 pc조차 멀리합니다. 스마트 세대라는 것이지요. 세대가 변화되어 갈수록 요구되는 것이 뭔지 압니까?"

"…?"

나의 즉답을 채근하듯 그는 서둘러 자문자답을 했다.

"교육 대신에 낙(樂)이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펀(Fun)이지요 Fun. 교육은 지루하고 딱딱해요. 우리에게 웃음을 주지 못합니다. 웃게 하고 신나게 하는 게 뭡니까. Fun 아닙니까. Fun, Fun…."

그의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았다. 사실은 나도 공감하고 있었다.

종래의 낙은 특별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선택된 사람이 만들고 누린다고 생각해왔다. 대중과는 일정거리가 있었다. 반면에 계몽적인 교육이 우리의 일상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계몽적이고 교육적인 태도에 심드렁해졌다. 그것에 유희적(Entertainment) 가치를 결합시켜 나갈 때 비로소 그것이 우리들의 관심권에 들어온다. 의미와 즐거움을 동시에 가지고 싶다는 것이다.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라 할까.

우리 시대를 상상과 창조의 시대라 부른다. 문화의 공급과 소비가 개인이나 사회적 질을 가늠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아름다운 볼거리에 머물고 상상과 희망을 안겨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눈앞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기능성에 만족하지를 않는다. 한발 더 나아가 스스로 참여하고 체감하면서 감동의 요람 속에 자신을 던져 넣고 싶어한다.

낙(樂)의 가치는 속도에 민감하다. 그러기에 이성에 호소하는 교육보다 감성에 호소하는 낙의 반응이 빠르다. 낙은 아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다. 그것은 닫힌 상태로선 불가능하다. 활짝 열어두어야 수신이 가능하다.

우리가 자랑하는 K-POP은 물론 콘텐츠산업이나 게임산업이 급속하게 발전해 나가는 것도, 정부에서 공공디자인과 아울러 스토리가 있는 행정을 펼치려는 노력도 모두 낙(Fun)의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하지 않을까.

김정식/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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