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량 27억t. 수면 직선거리 60㎞. 소양호의 현재 규모다. 저수량에서 충주호와 한국 최대를 다투고 총 면적 1천608㏊는 여의도를 20번 수장시킬 수 있는 규모다. 물은 담겨지는 그릇에 따라 모양과 운명이 결정되고 본디 호수와 산의 결합은 필연적이다. 산은 호수의 자연적 둑이며 수원(水源)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소양호는 모두 20여 개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이 산들은 호수의 든든한 배후가 되고 있다. 소양호의 북쪽 화점(花點)에서 우뚝 솟아 호수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산이 있으니 바로 춘천의 오봉산이다. 소양강의 전망대이자 '호수의 작은 항구' 오봉산으로 떠나보자.
◆소양호 급부상하면서 호반 산행지로 인기=삼봉산, 오봉산, 팔봉산…. 산의 봉우리 수가 때론 산 이름을 결정하기도 한다. 삼봉산만 하더라도 대략 10여 곳이 넘고 특히 오봉산은 전국에 수십 곳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봉우리 수를 갖추었다고 모두 이런 이름을 붙여 주는 건 아니다. 봉우리들이 개별적으로 수려함을 갖추어야 하고 이 봉우리들을 조합했을 때 상승효과가 커야 한다. 대표적인 곳이 홍천의 수반(水盤) 팔봉산과 고흥 팔영산, 오늘 오르는 춘천 오봉산이다.
오봉산의 본래 이름은 경수산, 청평산. 근래에 소양호가 관광지로 인기를 끌면서 호반 산행지로 급부상했다. 산 아래에 천 년 고찰인 청평사를 끼고 있고 절 주변에 많은 위인들의 행적과 에피소드들이 전해지며 문화유적 관광지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산과 호수가 결합되다 보니 등산로도 무척 다양하다. 호수와 산,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다면 소양강 선착장으로 가면 된다. 수륙양면으로 변화가 많다 보니 서울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코스다. 포털사이트의 블로그 후기에 보면 '기차 타고 춘천, 버스 타고 소양호, 배 타고 오봉산 간다'는 식의 유람기가 많이 올라와 있다.
일상에서 환승은 번거로운 일이지만 이곳에서는 육상, 수상이 교차되다 보니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경춘선 전철 개통 후 등반객이 3, 4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산이 주목적이라면 배후령으로 올라 다섯 봉우리를 돌아본 후 청평사로 내려가면 된다. 주로 내륙지방에서 올라오는 단체버스들이 이 코스를 이용한다. 산을 샅샅이 훑는 재미 외 승선료(왕복 5천원)와 문화재관람료(2천300원)를 절약하는 실익이 있기 때문이다.
취재팀이 찾은 배후령은 해발 600m. 춘천 신북면과 화천 간동면을 잇는 고갯길이다. 산허리 자락을 따라 개설된 도로는 40여 년간 춘천과 양구를 잇는 교통로로 자리 잡았다.
◆배후령으로 올라 오봉-청평사로 가는 코스 인기=경칩이 훌쩍 지나고 4월을 향해 달려가는 절기지만 춘천 산간의 날씨는 아직 차다. 배후령에 내리자 현지 안내인의 일성(一聲)도 '아이젠을 차라'였다. 영(嶺)자체가 600고지인데다 사면이 응달이라 등산로는 온통 빙판이었다. 오르막길에서 쩔쩔매는 한 여성에게 아이젠 한쪽을 내주고 스틱에 의지해 산을 오른다.
한동안 계속되던 경사길은 40분쯤 순한 능선을 열어 놓는다. 능선도 온통 눈이다. 때마침 북풍이 몰아쳐 체감온도는 영하 10℃를 오르내린다.
고흥 팔영산이나 홍천 팔봉산에서 익히 경험한 바지만 '봉'(峰)자 돌림 산들은 무척 험하다. 60도가 넘는 경사, 철계단에 로프까지. 봉우리에 오르는 길은 유격장을 옮겨 놓은 듯했다.
끝없이 계속되던 봉우리들의 레이스는 4봉(보현봉)에 이르러 주춤해지며 밑자락에 경치를 펼쳐 놓는다. 남쪽으로 소양강 물살이 은빛으로 일렁이고 잡목들 사이로 청평사 가람이 평화롭게 다가온다.
정상에서 청평사 쪽으로 하산 길을 잡아 나선다. 길은 또 한 번 암릉을 펼쳐 놓는다. 급경사마다 설치해 놓은 철 스텝을 밟으며 한발 한발 고도를 낮춰간다.
하산 길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이벤트도 마련되어 있다. 정상 근처의 홈통바위와 망부석이 그것이다. 내리막길 벼랑 틈새에 나있는 일명 구멍바위는 지름이 50㎝쯤으로 홍천 팔봉산의 '해산바위'와 비교할 만하다. 성인이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크기로 배낭을 멘 채 나가면 정상체중, 배낭을 벗어야 나갈 수 있으면 비만으로 진단하면 된다.
지아비를 기다리다 돌로 변했다는 망부석 바위는 좁은 암릉구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다. 이 위태로운 공간을 배경으로 노송들이 산수화를 그렸다.
망부석 앞에서 길은 다시 갈라진다. 오른쪽으로 나서면 적멸보궁으로 향하고 직진하면 다시 암릉길이 이어진다. 모든 길은 청평사로 연결된다.
산을 오른 지 3시간, 드디어 평지가 펼쳐지고 일행은 청평사 뒤쪽 경내로 접어든다. 청평사는 고려 광종(973년) 때 세워진 사찰. 전란을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되고 지금은 보물 제164호인 회전문(廻轉門)만 남아 있다.
◆당나라 공주와 상사뱀에 얽힌 전설 무대 청평사=청평사에서 당(唐) 공주와 상사(相思)뱀에 얽힌 전설을 만난 건 큰 수확이었다. 옛날 당(唐)에서 공주를 연모하던 청년(평민)이 있었다. 남자는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자살한 후 뱀으로 환생해 공주의 몸을 감아 공주가 위태롭게 되었다. 시름시름 죽어가는 공주를 보다 못한 황제가 공주를 신라에 보냈고 공주는 부처의 가호로 상사뱀을 떼어냈다는 스토리다.
단순한 전설 같지만 여기엔 국경과 신분, 금수(禽獸)를 넘나드는 초월적 로맨스가 깃들어 있다. 이런 심층적 구성은 설화사적으로 의미를 가진다 하겠다. 당시에 나당(羅唐) 유학생이 1만 명을 넘었다고 하니 지체 높은 공주가 춘천에 왔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하겠다.
이 전설을 따라 청평사엔 공주굴, 공주탕, 공주탑이 남아있고 공주와 뱀을 형상화한 조각도 세워 놓았다.
청평사의 또 하나 명물은 영지(影池). 못에 오봉산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는 이 못은 우리나라 못 유적으로는 최고(最古)로 고려 정원 양식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유적이다. 고려 때 이자연이 이곳에 문수원을 세우면서 정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이 정원은 일본 교토의 사이호사(西芳寺)의 고산수식(枯山水式)보다 200여 년이나 앞선 것이다.
경내를 빠져나와 일행은 소양호 선착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국내 최대 규모 담수호가 여기서부터 펼쳐진다. 아쉽게도 선착장 부근은 내륙으로 깊게 들어온 곳, 소양호 전경 감상은 배를 타고 한참 나가야 한다.
옛날 공주가 시종들과 함께 걸어 들어왔을 절 앞의 옛길들은 소양강댐 공사 때 수몰돼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옥빛 물결 속에서 공주의 흔적을 더듬을 뿐.
유람선이 떠난 자리 물가엔 포말만 긴 여운으로 남는다. 호수엔 다시 정적이 찾아들고 호면(湖面)엔 오봉산과 청평사의 잔영이 파랑으로 일렁인다. 장안(長安)에 귀국한 당(唐) 공주가 오봉산을 떠올렸을 때 바로 이 모습이 아니었을까.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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