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 앗따 요거시 머시당가?…. 참말로 거시기 혀불제…." 일정에 없이 단체로 들른 듯, 전시장의 노인들은 그림 앞에서 연신 놀랍니다. 처음 보는 생소하고 난해한 풍경들이 당혹스러웠나 봅니다.
몇 해 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삶의 풍경'이란 제목으로 시 한 편을 가지고 다양한 양태의 일상을 특별하고 별난 '회화'로 둔갑시켜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시인 황지우의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라는 시가 그것입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이빨 닦고 세수하고 식탁에 앉았다.
(아니다, 사실은 아침에 늦게 일어나 식탁에 앉았더니,
아내가 먼저 이 닦고 세수하고 와서 앉으라고 해서 나는
이빨 닦고 세수하고 와서 식탁에 앉았다.)
다시 데워서 뜨거워진 국이 내 앞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침부터 길게 하품을 하였다.
소리를 내지 않고 하악을 이빠이 벌려서
눈이 흉하게 감기는 동물원 짐승처럼
하루가 또 이렇게 나에게 왔다.
지겨운 식사, 그렇지만 밥을 먹으니까 밥이 먹고 싶어졌다.
그 짐승도 그랬을 것이다. 삶에 대한 상기(想起) 그것에 의해
요즘 나는 살아 있다.
비참할 정도로 나는 편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이빨 닦고
세수하고 식탁에 앉아서 아침밥 먹고
물로 입 안을 헹구고…
나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먹고 소파에 앉아서,
아내가 나갔기 때문에 하루 종일 집에서 혼자 놀았다.
…나는 소파에 앉아 하루 종일 격조 있게, 놀았다…
문학이 회화적 서술로 옮겨가는 흥미와 평면의 영원성을 말해 주는 것 같아 눈은 썩 즐거웠습니다. '평면은 영원한 텍스트다'라고 신봉하는 나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지요. 사람들이 붐비는 전시장에서 낡은 소파에 앉아 생각했습니다. 품위를 잃지 않은 한 시절, 고급스럽고 윤기가 흘렀을 이 소파는 지금은 시간의 내상을 입고 낡았지만 이 전시장의 중심에서 관찰자들의 의향을 살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내 그림의 문학적 수사나 자의적 해석을 시작한 까닭을 소급해 보기도 했습니다.
화중유시(畵中有詩) 시중유화(詩中有畵)라고 그러지요. 그림 속에 많은 함의가 시와 호흡하면서 다분히 이 시대를 말하는 듯합니다. 작품들을 살펴보면, 작위가 숨겨진 가죽소파는 찢어진 속을 드러내 자기 고백 같은 풍경을 분홍빛으로 그려 놓았고, 몸뚱아리의 부재는 공허한 싹을 키우고 실체가 빠진 옷은 허무한 현실 같습니다. 숲 속의 아스라한 빛 사이에 몽롱한 눈의 소년, 그리고 하나의 소파. 작가는 '괘종시계가 내 여생을 사각사각 갉아먹는 소리를 조용히 듣는다'는 식입니다. 안락함을 부추길 듯한 살찐 소파는 정작 없는데 두 남녀의 엉킴의 욕망만이 오롯이 드러납니다.
시인의 통찰을 붓의 각질을 벗겨 화가들이 그림으로 얘기합니다. 사실은 비닐로 된 가짜 가죽을 뒤집어쓴 인간의 삶과 무관하지 않은, 불온하기 짝이 없는 현실을 평면 위에 재생시켜 놓습니다. 해서 우리는 관찰자가 되어 문학을 번안해 놓은 그림을 보면서 차분히 자신을 위무하고 때로는 환기시킬 원인을 제공받습니다.
미디어, 영상, 설치 등 개념미술이 잠식한 것처럼 보이는 작금에 홀대의 시간을 견디며 '회화'가 꿋꿋이 돌아온 것 같았습니다. 오랜만에 번듯한, 그래서 더욱 사려 깊어 보이는 미술관에서 든든한 텍스트 하나를 읽은 느낌입니다.
권기철/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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