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출신 영국 소설가 아서 쾨슬러가 스탈린 체제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정오의 어둠'은 인간이 옳고 그름에 대한 개인적 양심의 판단을 뒤로하고 '조직논리'에 매몰될 때 어떤 비극적 결과가 오는지를 잘 보여준다. 소설의 주인공 루바쇼프는 볼셰비키 혁명에 헌신한 노장 혁명가지만 숙청당한다. 그는 자신에게 뒤집어씌워진 국가 배반죄를 처음에는 부정하지만 나중에는 이를 모두 시인한다.
그것은 고문을 당했기 때문도 아니고, 가족이 위협을 받았기 때문도 아니며 자백하면 사면해 주겠다는 언질을 받아서도 아니다. 심문관이 자백은 평생 충성을 바쳐온 당을 위한 마지막 임무가 될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루바쇼프는 이 말도 안 되는 충성의 방식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이러한 모순을 루바쇼프는 자기 합리화로 피해간다. 그가 수감된 방 옆에는 차르 체제 때 장교였던 사람이 갇혀 있었는데 루바쇼프의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자해 행위를 보고 대경실색한다. 그 장교는 "명예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는 것"이라고 비난하자 루바쇼프는 이렇게 대답한다. "명예는 세상을 시끄럽게 하지 않고 무엇인가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는 당이 자기에게 뒤집어씌운 범죄를 부정하는 것은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것"이며 누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죽는 게 혁명가의 마지막 임무라고 믿었던 것이다.
야권 후보 단일화 경선 과정에서 드러난 여론조사 조작으로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가 후보 등록을 강행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본인의 뜻은 아닌 것 같다. 지난 21일 트위터에 올린 글을 보면 그렇다. "완전무결 순백으로 살고 싶은 생각 왜 없겠어요. 사퇴, 가장 편한 길입니다. 그러나 상처를 입더라도 다시 일어서려 합니다." 22일 오전 한 인터넷 매체에 출연해서도 비슷한 심경을 보였다. "진보는 완전무결해야 하는데 내가 진보 정치의 앞날을 가로막았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좋은가, 꼭 나여야만 하는가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다." 거취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고민이 엿보인다. 그 배후에는 '경기동부연합'이란 조직이 있다고 한다. 이 대표가 사퇴할 경우 당권을 다른 파벌에 넘겨줘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이 조직이 사퇴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닥치고 후보 등록'의 뜻을 밝힌 그녀에게서 또 하나의 루바쇼프를 본다.
정경훈 논설위원 jghun31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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