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행복을 요리하는 의사] 해피엔딩의 조건

나는 드라마를 좋아한다. 책도 좋아하고 영화도 좋아하지만 드라마는 크게 시간을 내거나 마음을 먹지 않고 집에서 텔레비전을 켜는 것만으로 볼 수 있으니, 내 일상의 가깝고 작은 휴식인 셈이다.

청각장애인의 사랑을 그린 '내 마음이 들리니?'가 방영됐을 때 바쁜 중에도 틈틈이 챙겨보았다. 해피엔딩으로 끝나서 드라마가 남긴 여운에 한동안 따뜻하게 보냈다. 드라마는 사랑, 배신, 복수의 굴곡을 거쳤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등장인물들은 화해했고 주인공들은 결혼에 골인했다. 행복한 결말을 보면서 내 마음 속에도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나도 대부분 사람들처럼 해피엔딩을 좋아한다. 드라마가 이어지는 내내 주인공이 불운으로 점철된 시간을 보냈더라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면 문득 안도하게 되는 것이다. '다행이야, 이제 주인공은 행복해지겠구나'하고.

호스피스 병동에 근무하면서 '마지막회'가 중요한 건 드라마만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호스피스는 인생의 마지막회다. 허구인 줄 알면서 드라마조차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게 사람 마음인데, 현실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하랴. 통증 없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것이 우리 모두가 바라는 해피엔딩일 것이다.

이곳에 와서, 편안하게 삶을 끝내는 환자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웰 다잉(well-dying) 지도자 자격증도 보유하지 않았고, 입관 체험도 해본 적 없다. 사전 의료 지시서나 유서 등으로 삶을 미리 정리해둔 사람들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두 가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한 가지는 '나쁜 소식'이다. 그들은 자신이 암에 걸렸고 더 이상의 적극적인 치료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 한 가지는 '긍정적인 죽음관'이다. 죽음은 인생의 실패가 아니라 누구나 거쳐 가야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치료가 무의미하다는 말을 해도 불효자식이 아니다. 아내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말을 해도 잔인한 남편이 아니다. 우리는 그를 사랑하지만, 나쁜 소식을 알려야 한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환자는 그의 성정대로 뒷정리를 할 것이다. 누군가는 책상 서랍을 깨끗이 치워놓을 것이다. 소원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과 통증의 문제에 비하면 삶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는 오히려 나중 문제다. 사랑하는 이가 아프지 않게 떠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나쁜 소식을 알릴 용기를 내야 하는 이유다.

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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