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사람을 처음 만나면 우선 이름, 사는 곳, 직업 등을 물어본다. 거기에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고향이나 출신학교를 물어보고, 성이 같으면 관향(貫鄕)까지 물어본다. 같은 동향이거나 학교가 같으면 얼굴색이 환해진다. 본(本)이 같은 일족이라면 반가워서 서로 껴안는 이도 있다.
오래전 일이다. 한 스무 해 전 일이니까, 내 나이 막 불혹(不惑)을 넘겼을 때 이야기이다. 옆자리 이 주사 어깨가 축 처져 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번 과장 진급 심사에서 후배에게 밀렸다는 것이다. 후배도 한참 후배인 민 주사가 이 주사를 제치고 진급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민 주사는 이번에 새로 부임한 본부장과 동향에다, 학교도 동문이라고 한다. 본부장이 서울에서 내려오던 날 저녁, 칼바람 부는 겨울 날씨인데도, 본부장 사택 앞에서 2시간 넘게 기다리더라는 '카더라 방송'이 돌기도 했었다. 하긴 민 주사는 윗사람 비위 하나는 잘 맞춘다. 알랑방귀의 달인이다. 그러나 동료들에게는 인기가 없다. 특히 아랫사람들에게는 쌀쌀맞다. 그래서인지 다들 그와 자리를 같이하는 걸 피한다.
거기에 비하면 이 주사는 성실하다. 업무처리도 남들 못지않게 잘한다. 새벽같이 출근하여 밤늦게 퇴근을 한다. 그런데 흠이라면 흠이 있다. 우선 가방끈(학력)이 짧다.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5남매 장남으로서 겨우 고등학교만 마치고 이 회사에 들어왔다. 성격 또한 너무 올곧다. 때로는 윗사람에게 적당히 비위 맞출 줄도 알아야 하는데 너무 교과서적이다. 그러나 동료나 아랫사람들에게는 항상 웃으며 대한다. 온갖 궂은일은 혼자 도맡아 한다. 그러나 가방끈이 짧은 그에게는 당겨줄 튼실한 연줄이 없다.
짬짜미라는 순 우리말이 있다. 남들 모르게 자기네들끼리만 짜고 하는 약속이나 수작을 말한다. 한마디로 학연(學緣), 지연(地緣), 혈연(血緣)이 같은 사람들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인 것이다.
'○○공사 짬짜미 업체 대표 입건'이라는 뉴스 자막이 TV 화면에 뜬다. 경쟁력은 아예 배제하고 끼리끼리 속닥속닥 거리며 밀어주고, 당겨주는 짬짜미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 사회가 공정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문득 그날 저녁 회사 뒤편 골목쟁이 선술집에서 이 주사가 푸념하던 말이 생각난다.
"○○학교를 나왔나? 고향이 ○○인가? 성이 ○○○씨인가?"
김성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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