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대구시민야구장은 양준혁'이승엽 등 대구가 낳은 야구 스타를 보러 온 팬들로 넘쳐났다. 1992년 31만5천 명으로 떨어졌던 홈 관중은 이듬해 53만9천 명으로 급증했고, 1995년에는 팀 창단 후 가장 많은 62만3천여 명을 야구장으로 불러 모았다. 1993년 입단하자마자 신인왕을 거머쥔 양준혁, 1995년 사자 유니폼을 입은 이승엽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성적은 실망만 안겼다. 1994년 11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삼성은 1995년 5위, 1996년에는 6위라는 믿기지 않는 성적표를 받아들며 추락했다.
3년 연속 하위권에 머문 삼성에 1997년 역시 희망은 없어 보였다. 전문가들은 더는 삼성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다. 시즌을 열기도 전에 삼성은 쌍방울과 함께 꼴찌 후보에 꼽혔다.
예상은 적중하는 듯했다. 4월 25일까지 3승1무8패로 바닥권 성적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삼성은 5월 들어 수직으로 상승 곡선을 그렸다. 이 때문에 초유의 '부정배트 시비' 사건이 등장했다.
5월 초 삼성은 재계 라이벌 LG를 홈으로 불러들였다. 삼성은 무려 17개의 공을 펜스 너머로 보내며 3연전을 싹쓸이했다. 이를 시발점으로 삼성은 그해 66승7무53패를 기록, 4년 만에 다시 가을야구 잔치에 복귀했다.
부정배트 시비는 그해 5월 5일 참혹한 스코어로 3연패를 당한 LG의 이의 제기로 시작됐다. LG는 5월 3일 삼성에 3대9로 패했다. 5월 4일에는 까무러칠 만한 일이 벌어졌다. 5대27로 대패한 것. 4명의 투수를 올렸지만 삼성의 불방망이를 견뎌내지 못했다. LG에 삼성의 방망이는 쇠몽둥이 같았다. 정경배가 1회'2회 사상 초유의 연타석 만루 홈런을 터뜨린 것을 비롯해 최익성'류중일'김태균(2개)'이승엽'김영진 등 6명의 타자가 9방의 홈런을 작렬시켰다. 이승엽(3개), 양준혁'신동주(2개)는 2루타 7개를 합작했다. LG는 5월 5일에도 선발 김용수 등 7명의 투수를 투입했지만 이승엽'김한수(각 2개), 신동주에게 5개의 홈런을 허용한 끝에 1대13으로 대패를 당했다. 사흘 동안 삼성은 17개 홈런을 치며 49점을 뽑았다.
이전까지 LG는 10연승 신바람을 내는 등 선두를 달리고 있던 터라 당혹감은 더욱 컸다. 천보성 감독은 참혹한 패배가 단순히 실력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에 부정배트 의혹을 제기했고 삼성 백인천 감독은 발끈했다. 백 감독은 문제의 방망이(미국 플로리다 전지훈련 도중 구입한 미제 미즈노 제품)를 선택한 장본인이었고, 1990년 LG 감독 시절 압축배트 시비에 휘말린 전력이 있었다.
천 감독은 "삼성 배트가 일본야구기구의 공인 인(印)과 공인 등록 번호가 없고, 북미산 물푸레나무인 화이트애시가 원목인 배트 표면이 일본 홋카이도산 물푸레나무(아오타모)처럼 조밀해 일본에서 제작해 공수된 반 압축 배트 아니냐"고 주장했다. 이에 백 감독은 "좋은 재질로 만들어진 배트일 뿐, 부정배트는 아니다"며 강하게 맞받아쳤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5월 6일 삼성이 사용한 배트 두 자루를 수거, 인근 목공소에서 절단한 뒤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부정배트 시비는 사그라질 기미가 없었다. KBO는 5월 9일 일본 미즈노사에 성분분석을 의뢰했고, 이상이 없는 정상적인 배트라는 통보를 받았다. KBO는 즉각 이를 발표했고, 정식으로 규칙위원회를 소집, 배트 공인규정을 보완하기로 했다.
그제야 천 감독은 "배트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했지 압축배트라고 말하지는 않았다"고 발뺌한 뒤 "모든 구단이 다 함께 사용한다면 문제가 없지만 삼성만 그 배트를 쓰는 것은 부당하다"며 말끝을 흐렸다.
KBO는 다시 메이저리그사무국에 배트 정밀검사를 의뢰했다. 육안과 X레이 검사, 브라운대 생체공학연구소에서 도료검사까지 받은 결과 6월 16일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로써 부정배트 시비 소동은 삼성의 막강 타력에 넋을 잃은 LG 천보성 감독의 과민반응 해프닝으로 일단락됐다. 새로운 배트 규정이 제정되는 계기가 됐지만 삼성과 LG 간 감정까지 정리된 건 아니었다. 이 일로 KBO 박종환 사무총장은 1998년 3월 그 직을 내놓았다.
당시 삼성 1군 매니저였던 이성근 현 운영팀장은 "질 좋은 방망이인 건 분명했지만, 방망이 때문에 갑자기 타선이 폭발했다는 주장은 누구나 다 아는 억지였다. 그럼에도 다른 구단에서는 삼성과 똑같은 방망이를 구하느라 동분서주했고, 삼성은 방망이를 유출할 시 쫓아낸다는 금지령이 선수와 직원들에게 내려졌다. 어렵게 한 자루라도 구한 팀은 타자들이 돌려가며 사용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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