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올해 고3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또래 자녀를 둔 이 땅의 모든 부모와 같은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 아이는 모든 면에서 평균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므로 그의 삶은 힘들 것이다. 그 아이는 대개 우울하고, 그를 생각할 때 나도 우울하다.
나는 교육 문제 전반을 다룰 능력이 없지만, 내 딸로 인해 대학이라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돌려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나는 오늘의 한국 대학을 신뢰하지 않는다. 가까운 벗들 가운데 다수가 대학에 몸담고 있으며, 나는 그들의 인품과 교양을 존경한다. 그리고 그런 분들이 대학교에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내 딸과 같은 보통의 아이가 보통의 대학교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를 멈출 수 없다.
한국의 대학이 시장에 완전히 편입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내 세대가 대학생이었을 때, 대학은 시장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다. 오늘의 대학은 정반대로 시장에 많이 편입될수록 자부심을 가진다. 취업률이 모든 대학을 옥죄는 계율이 되는 순간, 대학은 개별 교수들의 인품이나 이상과는 별개로 시장의 하위 기관이 된다.
물론 이것이 한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1999년에 출범한 유럽 대학제도 개편 프로그램인 '볼로냐 프로세스'는 유럽의 대학조차 사정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예증한다. 유럽국제교육협회(EAIE)의 회장이었던 피오나 헌터는 "볼로냐 프로세스는 유럽의 노동시장과 대학교육 시장을 통합하는 것"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마이클 고브 영국 교육부 장관의 발언은 보다 노골적이다. "이 시점부터 사회과학, 인문학, 예술교육 등은 국가와는 무관한 일이며 이는 시민들 각자가 해결해야 할 일이다. 대학은 시장의 중개인 역할을 해야 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학은 이제 '근본적 질문의 제기'라는 오래된 역할을 포기했다. 나는 이 변화에 동의하지 않지만 대세를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붕괴하지 않는 한 그 역행은 불가능할 것이다. 소시민으로서의 내 걱정은 오히려 실용적인 쪽이다. 내 딸이 대학에서 과연 '시장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교양인은 못 되더라도 제 한 몸 건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대학에서 터득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긍정적인 대답을 발견하기 힘들다. 오늘의 한국 대학들은 저마다 유능한 직업교육소임을 자처하지만, 직업 교육에 적합한 시스템을 과연 갖추고 있는 것일까. 특히 인문학과들은 직업 교육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일까. 내 경험으로는 최상의 직업 교육 방식은 도제 시스템이다. 해당 분야의 유능한 장인 한 사람이 소수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오랜 시간에 걸쳐 직접 전수하는 것이다. 일반 대학보다는 전문대학이, 그보다는 전문적인 직업 교육기관이 이 방식에 더 가깝다.
그럼 직업학교에 보내면 되지 않는가라고 누군가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고민해야 할 선택이지만 그 선택이 아이에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대학교가 30여 년 전에 비해 3배 가까이 늘고, 전문학교가 전문대학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한국의 청소년들이 누구나 대학생이 되고 싶어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젠 지성과 교양, 엘리트, 저항 정신과 같은 매력적인 요소는 모두 사라졌다 해도, 대학생이라는 기호의 여전한 유혹을, 그리고 동년배의 대다수와 같은 사회에 속하고 싶다는 소망을 거절하기란 아직 어려운 일이다.
대학은 근본적 질문을 뒤로하고 시장적 기능을 앞세웠지만 지금은 어느 쪽에도 충실하지 못한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역사관광학과와 같은 절충적 간판을 내건다고 해서 그 교착이 해소되진 않을 것이다. 내 딸과 비슷한 능력을 지닌 대다수 아이들은 비싼 등록금이라는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대학생이라는 텅 빈 기호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고립을 감수하고서라도 보다 실용적인 선택을 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선거철을 맞아 반값 등록금이 몇몇 정당들의 선거 공약으로 내걸리고 있다. 물론 반값 등록금은 나의 생활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도움의 약속보다는 한국의 대학이 처한,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처한 교착 상태에 대한 최소한의 대안을 먼저 듣고 싶다. 그리고 그 대안을 고민하는 사람과 정당에게 어쩔 수 없이 호의를 가지게 될 것 같다.
허문영/영화평론가·영화의전당 영화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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