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27) 씨는 지난해 8월 우울증을 앓던 여자친구 C(당시 25세) 씨를 하늘로 떠나보냈다. 한동안 상심했던 L 씨는 마냥 슬픔에만 젖어있을 수 없어 여자친구의 가족과 함께 C씨가 남긴 물품을 정리하며 마음을 추스르려고 했다. 그러던 중 L씨는 C씨의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발견했다. 찰나의 충동이 그를 범죄의 길로 인도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백화점에서 일하다가 그만둔 뒤 돈이 필요했던 L씨는 C씨가 사망한 지 두 달이 흐른 지난해 10월, 처음으로 그 카드에서 현금을 인출했다. C씨와 5년 가까이 사귀며 서로 개인 정보를 공유했던 터라 카드 비밀번호도 미리 알고 있었다. 대구 북구 산격동의 현금인출기에서 수백만원을 꺼낸 뒤 생활비로 사용했다. 경찰 조사에서 L씨는 지난해 10월부터 12월까지 13차례에 걸쳐 현금 1천100여만원을 인출해 생활비로 충당하거나 유흥비로 탕진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의 범행은 5개월 만에 탄로났다. 딸의 통장과 카드 등 금융기관 거래를 정리하던 C씨 부모가 죽은 딸 통장에서 현금이 인출되는 것을 이상히 여겨 경찰에 신고한 것.
경찰은 "C씨 유족들은 L씨가 숨진 딸과 오랫동안 교제했기 때문에 유품 정리도 믿고 맡겼는데 이 같은 일을 저질러 큰 배신감을 느꼈다"고 혀를 찼다. L씨는 뒤늦게 눈물을 보이며 "여자친구에게 너무 미안하다"며 C씨 부모에게 선처를 호소했고 C씨 부모는 그가 쓴 1천100여만원을 고스란히 물어주기로 했다. 대구 북부경찰서는 28일 L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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