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현수의 시와 함께] 은어와 나

여름까지

묵은지 도시락 반찬을 싸갔다

더럽다며

도시락에 침을 뱉어버린

반장 흥섭이

군둥내를, 가난을 싫어하는

부유한 그의 침

저항할 수 없었다

나는 그날부터 점심을 먹지 않았다

샐비어 꽃을 벌과 함께 쪽쪽 빨았다

집으로 가는 길

신김치가 든 도시락을

섬진강에 탈탈 털었다

떨어지는 한 뭉치의 보리밥 추 위로

낙하산같이 펼쳐지는 묵은김치

은어떼들이

툼벙, 떨어진 밥 뭉치에 투망을 친다

강물이 후두두 뒤집힌 후

잠잠히 흘러간다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적성다리 초입에 들어서면

은어떼들

밝은 전구를 켜 놓은 듯

저 멀리서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내 가난한 슬픔이

은어의 배를 불리던 시절

  이인철

낯선 상상력으로 삶의 이면을 새롭게 보게 하는 이인철 시인의 작품입니다. 이번에는 어린 시절의 아픈 풍경을 아주 서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네요. 이런 상처는 좀처럼 낫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에 그저 아프게 지켜볼 수밖에요.

가난한 시절, 남들보다 조금 덜 가난할 뿐인 사람들이 이런 상처를 주곤 했지요.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재산보다 더 가난해졌기 때문이지요. '부자 되세요'가 공공연한 인사가 되어버린 걸 보니, 가난한 시절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봅니다.

시인·경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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