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 백일장] 문병/군자란 예찬론/초승달/허공에서 길이 되기까지

♥수필1-문병

때마침 장날이었다. 시장에 들러 우족(牛足) 두 개에 사태살 두어 근을 보태 친구집으로 향했다. 팔순을 넘기신 친구 아버님께서 암과 사투를 벌이신다는 소식을 접하고 소뼈로 곤 곰국만 겨우 드신다기에, 돌아가시고 나면 마음에 걸릴 것 같아 곰국거리를 사 갔더니 어머님은 몇 번씩이나 인사를 하셨다.

친구네 집에 처음 간 것은 고3 때였다. 친구 아버님은 옛날 나무 상(床)을 만드는 장인(匠人)이셨지만 값싸고 간편한 호마이카 상의 선풍적인 인기에 밀려 그만 퇴락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아버님의 수입이 줄어들자 어머님께선 군청 사무실 청소부 일을 시작하셨다. 군청과 군수 관사를 오가며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퇴근 때에는 구내식당에 버려진 잔반을 얻어 머리에 이고 오셔서 돼지와 개를 키우며 참 알뜰하고 억척스럽게 사셨다.

친구집에는 같은 반 친구 정현이가 하숙을 하고 있었다. 나도 그들과 어울리면서 먼 통학길을 핑계로 친구집을 수시로 드나들며 여러 날을 먹고 자며 다녔다. 빈대 붙어사는 것이 사뭇 죄송했지만 그렇다고 쌀가마를 업어다 드릴 형편은 되질 못했다. 쌀 한 되가 아쉬운 어려운 형편이었겠지만 친구 부모님은 그런 나에게 따뜻한 밥상을 차려 주시면서도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1년을 보낸 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난 고향을 떠나왔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아들의 밀린 하숙비가 늘 마음에 걸려 하시다가 벼르고 별러 메주 한 말을 만들어 이고 혼자 친구네 집을 물어서 갖다 드리고 왔다고 하셨다. 그 후 결혼을 하고도 가슴속 언저리에 남아 있는 밀린 밥값에 대한 죄스러움에 쌀 한 가마를 보내 드렸지만 빚진 마음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명절에 고향을 찾으면 가끔씩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올 때도 있었지만 사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마음에만 머물 뿐 아직도 그 공을 다 갚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버님은 벌써 떠날 준비를 하고 계셨다.

세월이 흘러 친구는 지금 어머님께서 근무하시던 군청에서 형님과 같이 나란히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군청 청소부를 하면서도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 놓으셨는데, 50년을 넘게 함께한 남편과는 이제 마지막 이별을 준비하고 계셨다. 옷 속까지 파고드는 한기에도 불구하고 언덕 밑 주차장까지 배웅을 나오신 어머님은 내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계셨다. 백미러에 비친 어머님의 모습에서 30년 전 메주 보따리를 이고 고갯길로 숨을 헐떡이며 친구집으로 향하셨을 어머니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남의 공은 절대 잊지 말라는 어머니 말씀과 함께….

이대전(칠곡군 지천면 연호2길)

♥수필2-군자란 예찬론

봄볕이 제법 따뜻하다. 꽃들이 봄마중을 나왔다. 우리 집에 군자란도 만개했다. 봄이면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 주황색 꽃이 모여서 피는 꽃. 행여 겨울 추위라도 탈세라 옷도 해 입혀 주었다.

군자란을 보는 반가움도 잠시 주황색 꽃은 서둘러 사라져 간다. 이제 알겠다.

잠깐의 꽃을 피우기 위해 겨울부터 채비를 했다는 것을, 하지만 기억 속에 일 년 내도록 남아 잊혀지지 않는 꽃임을. 너를 위해 기다리는 수고를 아끼지 않겠다. 내년을 기약하는 나의 마음은 벌써부터 분주해진다.

소박하게 기억되는 꽃들이 있다. 화려한 미소는 금방 질리지만 소박한 꽃들은 오래 기억된다. 화려한 친절은 값비싼 포장, 소박한 친절은 은은한 아름다움, 우리네 인생도 그렇게 살았으면 화려하지 않게 소박하게 순간순간을 진실되게 노력하며 순간을 위해 영원을 꽃피우는 군자란처럼 그렇게 살았으면….

이정화(경산시 경산로)

♥시1-초승달

저녁상 물려놓고 밤 마중 나가며

옛 친구 하루 저녁 머물고 가는 빈자리

온 집안 빈 공허만 가득하고

눈으로 말하는 이별의 노래

어두운 밤, 가느다란 가지 끝 사이로

얼굴 내미는 초승달 벗 삼아

할 말이 아직 남았건만

정다운 빛 선사하는 희망 섞인 모양새

가득한 온달보다 내 가슴 설레게 하네.

행복한 밥상 작은 밥상

흘린 땀이 없어 그냥 먹기 가슴 저려하며

사람 향기 취하는 마주하는 가족이 있어 행복하네

작지만 만족할 줄 알며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즐거워 오늘 저녁 끝없는

행복한 속삭임으로 살아가는 신음소리

벗겨버린 너울처럼 한 끼의 행복한 밥상

내일이 있음에 행복하네

빈약한 음식 고생을 싫어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마주함에 감사하다.

장명희(대구 달서구 이곡2동)

♥시2-허공에서 길이 되기까지

0에서 1이 되기까지

그 얼마나 긴 고통과 인내를 해야 하는지

그 누구도 모를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그 사람의 마음 하나 얻기까지가

그 얼마나 긴 여정일지 모를 겁니다.

2에서 9까지의 길이 꽃밭이라면

0에서 1까지의 길은 왜 이리 험난하고 긴 여정인지요.

하지만 나는 그 긴 여정을 가려 합니다.

비록, 내 발이 피투성이가 된다 해도

당신을 향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신민지(대구 북구 관음동)

※지난주 선정되신 분은 나희봉(대구 달성군 화원읍) 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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