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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미리 보내는 유언'처럼… 매일신문 출신 최기호 시인의 '큰가르침과 울림'

부고도 묘지도 안쓰고 시신은 기증, 세 자녀 결혼식도 알리지 않아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최기호 시인이 부고는 물론 묘지도 쓰지 않고 시신을 경북대 의과대학에 교육용으로 기증한 것으로 밝혀져 남은 이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게 하고 있다. 생전의 최씨 모습.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최기호 시인이 부고는 물론 묘지도 쓰지 않고 시신을 경북대 의과대학에 교육용으로 기증한 것으로 밝혀져 남은 이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게 하고 있다. 생전의 최씨 모습.

언론인 출신 향토 시인 최기호(1931∼2012) 씨가 살아서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올곧게, 세상을 떠나면서는 부고(訃告)는 물론 묘지도 쓰지 않고 시신을 경북대 의과대학에 교육용으로 기증한 것으로 밝혀져 이 사회에 '큰 가르침과 울림'을 주고 있다.

최 시인은 25일 오후 3시 55분 슬하의 1남 2녀를 비롯해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택에서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이미 2006년 부인과 함께 경북대 의과대학에 시신기증 등록을 했다. 생전에 그는 부인과 함께 경북대 의과대학 시신실에 들러 차를 마시면서 "이곳이 바로 우리 내외의 무량극락전 호텔"이라는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2008년 2월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와 이번에 자신이 떠날 때도 자신의 시 '미리 보내는 유언'처럼 "죽음을 다른 이에게 알리지 말고 조의금을 받지 말며 장례식은 물론 묘지를 만들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고, 자식들은 이 유언을 따랐다.

고인은 1995년 열 세번째 시집 '미리 보내는 유언-저승이 목마르다 하니'라는 제목의 시를 유언으로 남겼다.

'세상길 다하거들랑 까불어 키질은 말고/ 울고 불고 목메일 것도 통부(通訃)도 상복(喪服)도 말고/ 아버님 잠드신 산자락에 한 줌 뼈로 묻히리라/ 잠 드신 아버님 산자락 비(碑)도 상석(床石)도 말고/ …조율이시(棗栗梨柹), 홍동백서(紅東白西) 다 집어치우고 무축(無祝)분향 단배 좋네/ 저승이 목마르다 하니 술이나 한잔 치게.'

고인은 되도록이면 가지지 않으려는 삶을 살았다. 또한 유신반대론으로 수많은 고초를 겪는 등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자신의 글을 통해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돈과 재떨이는 모일수록 썩거나 더러워지기 쉽다'고 했다.

지인들은 고인이 고향과 지역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고 인재를 키우는 데 헌신적이었다고 했다. 자신의 자선 시서전 수익금과 결혼식 주례 사례금, 지인들이 명절 등에 건네준 돈을 모아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왔다. 1981년 자신의 호를 따 휴산(休山)장학회를 설립한 뒤 2008년에는 27년 동안 모은 장학금 1억100만원을 동아꿈나무재단에 기탁했다.

자신에게는 엄격했지만 남들에게는 "베풀고 살아라" "봉사하라"는 말을 늘 강조하고 실천했던 '큰 나무'이기에 주위 사람들은 고인의 죽음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추모하고 있다.

고인은 25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매일신문 부장 등을 거쳐 1979년 퇴사했다. 퇴사 이전부터 경산독서회라는 대학생 동아리를 만들어 젊은이들이 지역사회에 봉사할 수 있도록 후견인 역할을 했다. 1990년부터는 1년에 봄, 가을 두 차례 발간하는 '고향등불'이라는 간행물을 통해 자신의 일과 나라와 겨레를 고향과 같이하자고 고향사랑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고인은 신석정 시인에게서 시를 배운 뒤 1978년 정완영 시인의 추천을 받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문인이다. 그동안 29권의 시집을 냈고, 이외 수상집과 만평집도 다수 발간했다.

금융감독원에 근무하는 아들(56)은 "우리 1남 2녀의 결혼식 때는 물론 어머니가 이 세상을 하직했을 때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부조금도 받지 않은 채 가족들끼리 조용하게 치렀다"며 "아버지의 뜻이 허례허식을 개선하는데 밀알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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