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살던 고향은] 39)남병탁 경북고용포럼 대표의 영덕 지품

푸른 자연 품속에서 자랐다, 고맙다!

물놀이, 은어잡이 등 눈길 닿는 곳마다 추억이 묻어나는 영덕 오십천. 염소 치는 아저씨에게 쫓겨 허우적거리며 무작정 강을 건너 도망치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오십천에서 추억의 징검다리를 다시 건넌다. 그 많았던 은어들…. 다 어디 갔을까?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물놀이, 은어잡이 등 눈길 닿는 곳마다 추억이 묻어나는 영덕 오십천. 염소 치는 아저씨에게 쫓겨 허우적거리며 무작정 강을 건너 도망치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오십천에서 추억의 징검다리를 다시 건넌다. 그 많았던 은어들…. 다 어디 갔을까?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내 고향 영덕군 지품면 신양리. 마을 앞으로 오십천의 지류인 달산천이 흐르고 있다.
내 고향 영덕군 지품면 신양리. 마을 앞으로 오십천의 지류인 달산천이 흐르고 있다.
모교인 영덕초교. 아버지를 따라 학교 사택에 살았던 1학년 때, 밤에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학교 목조 건물이 불타는 현장을 목격, 오랫동안 충격으로 남았다.
모교인 영덕초교. 아버지를 따라 학교 사택에 살았던 1학년 때, 밤에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학교 목조 건물이 불타는 현장을 목격, 오랫동안 충격으로 남았다.
남병탁 경북고용포럼 대표
남병탁 경북고용포럼 대표'경일대 교수

고향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린 시절 오십천에서 친구들과 헤엄치며 뛰놀던 시절이 정겹게 떠오른다. 학교 운동장에서 어두컴컴해질 때까지 구슬치기하고 딱지 따먹기 하며 놀다가 집에 늦게 들어가 혼났던 시절. 천진난만하게 뛰어놀며 자연의 혜택을 받고 자란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내 고향은 영덕이다. 영덕군은 경북 동북부에 위치하여 동해 푸른 바다를 접하고, 태백산맥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나온 칠보산과 팔각산이 있으며, 영덕의 젖줄인 오십천이 오십 리 물길을 이루고 있다.

영덕은 고려 초부터 내려온 이름인데 삼국시대에는 야시홀(也尸忽), 신라통일 후에는 야성군(野城郡)이라고 불렸다. 이후 1914년에 영해군을 합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야성이라는 명칭은 지금도 야성초등학교라는 학교명에도 남아 있다. 이전에 영덕은 여느 지방처럼 내륙은 논농사, 해안은 수산업이 주를 이루었고 복숭아 산지로 유명하였는데, 오늘날은 영덕대게, 삼사해상공원, 강구항, 해맞이공원, 풍력단지, 대진해수욕장, 고래불해수욕장, 옥계계곡, 나옹선사 등 다양한 관광자원을 개발하여 영덕이 동해안 관광명소로 알려지고 있다. 최근에는 강구항에서 고래불해수욕장까지 총길이 50㎞의 산과 바다를 잇는 블루로드를 개발하여 많은 사람들이 트레킹을 즐기고 있고 여름이면 피서행락 차량과 인파가 넘쳐난다.

내가 태어난 곳은 지품면 신양리 식률(植栗)이다. 지품면 신양리는 16세기 후반에 영양 남씨가 입주하여 집성촌을 이루었고, 식률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시골마을이다. 마을이 뒷산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마을 앞에는 오십천의 지류인 달산천이 흐르고 있다. 달산천은 신양에서 지품천과 합류하여 오십천을 이룬다. 어릴 때부터 송정공파 25세손이란 말씀은 누누이 듣고 외우며 자랐다.

식률 입향조 종가에는 1859년 창건된 죽은당(竹隱堂)이라는 정자가 있다. 정자 뒤에 대나무숲이 있고 11대조께서 죽은장사랑(竹隱將仕郞)이셨기에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정자의 현판 액자에는 죽은당원운(竹隱堂原韻)이란 글이 있다. '백동시냇가 정자에/ 무성한 대 뜰 위에 솟았네/ 맑은 소리에 티끌 생각 멀어지고/ 서늘한 그늘에 속세 인연 드물구나/ 생애 담박하니 마음에 병도 없고/ 사업도 조용하니 공부만 깊어가네/ 이 사이 그윽한 취미를 그대들 알겠느냐/ 죽은 두 글자 나를 편안하게 하네'란 내용이다. 이 원운에 대한 하정 이충호(霞汀 李忠鎬)의 근차죽은당운(謹次竹隱堂韻)도 있다. '죽은당 옛 정자에/ 지금도 푸른 대 뜰에 가득하네/ 어찌 굳센 절개 서리온다 변하랴/ 맑은 마음 달 따라 더 밝구나/ 술두루미엔 손님 맞을 술 무르익고/ 책상엔 선현을 배우던 책 쌓였네/ 봉황 같은 자태 아직도 완연하니/ 나는 듯한 정자 축하하도다.' 당시 선조의 풍류를 알 수 있다.

영덕읍에서 영덕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보낸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몇 가지 사건과 추억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밤에 소변을 보기 위해 잠에서 깨어나 방문을 열었는데 바로 앞의 학교가 불타고 있지 않은가! 바로 눈앞에서 시뻘건 불기둥이 좌우로 휘저으며 하늘로 치솟고 사이렌 소리가 급하게 울려댔다. 사이렌 소리와 불기운에 부모님도 깨어나시고 짐을 싸서 대피하였다. 영덕초등학교는 불탔지만 다행히 집은 무사했었다. 나는 이때의 충격으로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사이렌 소리만 들으면 깜짝깜짝 놀라곤 하였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에는 그해 12월 5일 선포된 국민교육헌장을 외는 방학숙제가 있었다. 나는 방학 동안 정말 '국민교육헌장' 제목만 외우고 숙제를 다 했다고 생각했었다. 개학 첫날 다른 아이들이 내용을 외우는 것을 보고야 전문(全文)을 암기하는 숙제였음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부랴부랴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를 외웠었는데 마침 나는 전반부만 발표하게 되어 그때 급히 외운 것을 더듬어 무사히 그 위기를 넘겼었다. 이때부터 행사 때마다 국민교육헌장이 낭독되고 나도 전문을 다 암기하였다. 국민교육헌장은 이후 문민정부를 지나면서 군사독재의 잔재로 여겨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니 공부하던 생각은 별로 없고 그냥 친구들과 오십천에서 물놀이하며 놀던 일만 생각난다. 오십천에는 맑은 물에 사는 은어가 있었는데 워낙 재빨라서 잡기가 힘들었다. 돌 사이사이에는 뱀장어가 있어 돌을 가만히 들어 잡기도 하고, 비가 온 뒤 물살이 세지고 물이 많아지면 반도와 모래무지를 만들어 물고기를 잡았던 기억이 난다. 동네 아이들이 물놀이하던 깊은 웅덩이가 있었다. 다들 겁도 없는지 물에 잘도 뛰어들고 수영도 잘도 하는데 나는 수영을 못하여 겁을 먹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도 겁쟁이라는 소리를 안 들으려고 텀벙 뛰어내렸는데 배가 갈라지는 듯 아팠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한 번은 친구들과 오십천에 놀러 갔다가 염소 치는 아저씨로부터 쫓겨 오십천을 허우적거리며 건넜던 적이 있다. 그래 저래 강을 건너 친구들과 도망치고 그 아저씨가 더 이상 따라오지 않게 되어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아찔한 순간이었는지 모른다. 그 강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강을 건너 도망간 그 일이 지금도 생각하면 아찔하다.

방학이면 으레 큰집이 있는 식률(植栗)에 다녀오곤 하였다. 식률이란 지명에는 밤(栗)이 있는데 정작 동네에는 감나무가 많았다. 겨울방학에 놀러 가면 할머니가 홍시를 잘 보관해두셨다가 내주시곤 하셨다.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과 인자하신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호기심에 마당에 있는 벌집을 장대로 쑤셨더니 벌들이 떼를 지어 덤벼들었다.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갔었지만 결국에는 벌에 쏘여 퉁퉁 붓고 울던 기억이 난다. 여름방학에는 마을 앞 냇가에 가서 멱 감고 마루에 올라앉아 참매미 소리를 실은 시원한 바람에 한여름의 더위를 식히곤 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대구로 이사를 왔다. 대구에서 영덕까지 버스로 4시간 반 소요되었는데 도중에 있는 안강 시태재를 꼬불꼬불 돌아 오르고 내려가면 나는 으레 멀미를 하였다. 차멀미 때문에 고향 가기가 예전처럼 즐겁고 신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스런 일이 되었었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고향 가는 첫길에서 가장 반가웠던 것은 그 꼬불꼬불 안강 시태재 길이 시원스런 직선대로로 바뀐 것이었다. 비포장이었던 동네 앞 신작로도 포장이 되어 다니기가 훨씬 쉬워졌다. 어릴 적 그렇게 멀게 느껴졌던 고향 길이 이제 2시간 거리로 단축되었다. 그럼에도 지금은 고향에 자주 가지 못하고 벌초와 성묘 때만 들어간다.

산업화와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려 동네 아이들은 도시로 나갔고 어린 시절 방학을 보내던 집과 뛰어놀던 마당은 폐허가 되어 옛날 정겹던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그렇지만 정감 어린 고향과 어린 시절 추억은 내 마음속에 남아 바쁘게 살아가는 나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다.

남병탁 경북고용포럼 대표'경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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