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빨리 와 봐요. 무서워요!" 산모롱이 묘지 옆을 지나가던 아내의 겁먹은 소리가 들린다. 달려가 보니 무덤 뒤편에는 누군가 내다버린 폐비닐 조각들이 나뭇가지에 걸려 펄럭이고 있다. 마치 형형색색의 만장(輓章)이 춤을 추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 모양새가 희읍스름한 어둠 속에 파묻혀, 상여 앞에서 줄지어가는 깃발의 환영(幻影)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지난주 일요일 아침이다. 나를 바라보는 아내의 표정이 심상찮다. 한참 동안 뜸을 들이다가 말을 끄집어낸다. "성암산 초입에다 한 30평 남짓한 묵정밭을 빌려놨으니, 오늘은 밭일을 나갑시다"라고.
직장에서 퇴직 후 거실소파에 앉아 TV 리모컨이나 돌린다고 타박만 하던 아내가 며칠 전부터 살갑게 구는 이유를 알 만했다.
밭에는 이름 모를 잡풀들이 무성하였다. 어설픈 일꾼이라 그런지 풀을 베어내고, 밭고랑 만드는 일도 녹록하지 않았다. 땅 밑에는 풀뿌리가 이리저리 얽혀 있고, 시커먼 비닐 조각들도 묻혀 있었다. 묵혀놓은 땅인지라 들풀이 자라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비닐은 좀 심하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밭 주위에도 몰래 내다버린 쓰레기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나무막대기나 종이라면 태워버리기라도 하겠지만, 플라스틱으로 만든 잡동사니들은 소각하기도 곤란하다. 다들 자기 집 안마당, 안방은 윤기가 나도록 쓸고 닦고 요란을 떨건만…….
힘이 빠진다. 일하다 말고 밭둑에 앉아본다. 맞은편 비알 밭에는 허리 구부정한 농부가 경운기 뒤에 실린 황토를 삽으로 퍼내고 있다. 한 삽 한 삽 정성을 다해 밭고랑을 메우고 있다. 땅 진기 다 빠져버린 푸석푸석한 땅에 객토(客土)를 하고 있는 중이다. 농사지을 젊은이가 없어 묵정밭이 수두룩한 요즈음에 객토라니? 땅심을 높이려는 농심(農心)이 노인의 등허리에 묻어있다.
유년 시절, 고향집 앞 빈터에는 켜켜이 쌓아 놓은 두엄 무더기가 있었다. 꼬맹이 키로 두어 배 될 만큼 높다랗게 쌓아 놓았다. 그 당시 농촌에는 버릴 것이 별로 없었다. 음식물 찌꺼기도, 사람들의 배설물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 그제 본 묘지 옆 나뭇가지에 걸려 귀신 형상을 하고 있는 비닐조각이나, 찌그러진 플라스틱 바구니는 상상도 못했다. 두엄을 먹고 자란 곡식은 병충해에도 강해 농약을 칠 필요가 없다. 밭에서 금방 따온 고추나 오이도 씻지 않고 바로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농사짓는 땅을 천대하고 있다. 땅심은 염두에 두지 않고 화학비료에다 농약만 쳐댄다. 땅이 화가 많이 나있다.
요즈음 나는 아침저녁으로 텃밭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잡초도 뽑아주고, 농협 공판장에서 사온 계분(鷄糞)도 뿌려주는 등 그 옛날 선친께서 하시던 그대로 땅심을 돋운다. 아마도 하늘에서 이를 보고 계실 부모님도 고개를 끄덕이고 계시리라. 오늘도 삽질하는 팔에 힘이 솟는다. 김 성 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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