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에 지프가 지나간다. 차에 매단 마이크에서는 요란한 구호가 울려 나온다.
'코도 하나요, 입도 하나요, 막대기도 하나. ○○○후보'.
뒤이어 반대당(黨) 트럭이 지나간다. 이번엔 다른 구호가 울린다.
'귀도 둘이요, 눈도 둘이요, 막대기도 두 개. △△△후보'.
1950년대 국회의원 선거 거리 풍경이다. 글씨를 읽어서 후보 가려낼 유권자가 20%도 될까 말까 하던 문맹 시절이다 보니 선거 벽보에조차 아라비아 숫자 1 2 3 4 대신 막대기를 그려 넣었다. 기호 1번 후보는 '코도 하나요, 입도 하나'라고 떠들고 2번 후보는 '귀도 둘이요, 눈도 둘'이라고 선전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 얘기다. 유권자(국민)들이 눈, 코, 입 숫자 세기로 후보를 가리는 수준이면 선거를 통한 대의(代議)정치의 결과는 뻔하다. 무식과 가난에 절어 있는 대중에게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쓰레기통에 핀 장미꽃'이었다. 대중의 빈곤을 이용한 정치꾼들은 고무신 한 켤레에 표를 팔고 막걸리 한 잔에 표를 내던지도록 선거 부패를 조장했고 몽매한 대중 또한 쉽게 현혹됐다. 그리고 그 결과 어설픈 민주주의는 군사혁명을 불렀다.
민주적 선거제도가 100년 가까이 앞섰다던 미국도 1860년대 무지몽매한 흑인 유권자들에게는 세금(인두세=人頭稅) 영수증을 내야 투표권을 준 적이 있다. 처음엔 흑인들도 빚을 내가며 세금을 내고 자기네 권익을 지켜줄 후보를 찍자고 뭉쳤다. 그러나 반대당이 흑인 동네에 서커스단을 끌고 와 세금 영수증을 주면 무료 입장시켜준다고 꼬드겼다. 서커스가 보고 싶었던 흑인들은 너도나도 투표권인 세금 영수증을 내주고 공짜 구경을 즐겼다. 며칠 뒤 투표장에는 그 마을 흑인 유권자는 그림자도 없었다. 권익 옹호자를 뽑겠다는 의지가 서커스 구경으로 팽개쳐진 것이다. 유권자의 깨어 있는 의식과 양식 있는 선택의 중요성을 깨우치는 일화다.
민주국가 건국 60년이 지났다는 지금의 우리 모습은 어떤가. 당장 지난 선거들을 돌아보라. 이성보다는 '바람 따라 이념 따라' 찍어주고 뒤늦게야 너도나도 '손가락을 잘라 버리겠다'며 자조하는 같잖은 짓을 몇 번이나 반복했던가. 대학 진학률 84%, 소득 2만 달러 OECD 국가라는 유권자 자존심 빼고는 60년 전 '코도 한 개, 막대기도 한 개' 하던 막대기 선거 시절과 크게 달라 보이는 게 없다. 공천 세력이 공천 막대기 들고 다니며 찔끔찔끔 찔러보다 이곳저곳 마땅찮으면 아무 데나 갖다 꽂아놓고 '여기 와서 찍어라' 하는 꼴은 그대로다. 듣도 보도 못한 인물에게 공천 딱지 붙여서 막대기 세우듯 꽂아주면 표 도장 찍는 로봇 모양 몰려가 꾹꾹 찍어주는 선거가 된다면 눈도 둘, 귀도 둘 하던 시절의 선거와 얼마나 다를 것인가.
몇 번을 거푸 뽑아 줬음에도 꼴찌 경제 대구의 오명은 그대로 남아있는데 '내가 경제통이오'라며 또 뽑아 달라는 후보들은 어떻게 봐야 하나. 호적등본만 대구'경북에서 뗄 뿐 초'중'고 하나 안 다녀보고 어느 날 막대기 꽂는 사람 뒷심 업고 '나 고향 사람이오' 하고 내려와 표 달라는 후보는 또 어떻게 판단하나. 다음 주면 이런 의문들에 대한 냉혹한 답을 내줘야 한다. 이번 총선은 막대기 수 세어보고 찍던 시절의 선거가 아니다. 똑똑해진 유권자들은 어디서 뭐하다 찾아온지 모르는 일부 낙하산들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다. 지금 밑바닥에 그들의 바람이 소리 없이 불고 있다. 이번만큼은 막대기 선거에 본때를 보여주자는 바람이다. 야당 대표(한명숙) 비서참모의 공천 미끼 뇌물 얘기, 2천600여 건 관'민간사찰도 사실은 80%는 노무현 정권 시절에 한 것이고 20%만 우리가 했다고 다투는 오십보백보의 진흙탕 싸움, 그런 수준의 정당들이 세운 막대기만 보고 찍어줄 '도장 찍는 로봇'은 더 이상 없다.
지금 우리 국회의원 수는 인구 16만 명에 1명꼴이다, 멕시코(21만 명)보다도 많고, 일본(26만 명)보다 많고, 브라질(37만 명)과 미국(70만 명)에 비하면 2~3배다. 민주선거가 좋다지만 고작 20% 안팎 표만 얻어도 금배지 300개를 다 채워주는 것은 진정한 대의정치가 못 된다. 득표수가 몇 % 이하면 차라리 그 선거구는 안 뽑고 1대(代)쯤 비워서 의석수를 줄이는 것도 개혁이다. 눈도 둘, 코도 하나 시절의 유권자가 아니라면 이번 선거는 그런 개혁 법안 만들어도 공천권자 눈치 볼 것 없는 큰 인물로 뽑아보자.
김정길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탄핵안 줄기각'에 민주 "예상 못했다…인용 가능성 높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