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지례 흑돼지

산골에서 자라 살은 쫄깃쫄깃…식당은 북새통

비계가 둥둥 뜬 돼지국물에 순대를 넣고 밥까지 말아 두어 그릇 뚝딱 하고 나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저녁답이 되자 마른하늘에 벼락이 친다더니 갑자기 뱃속에서 우르릉하는 천둥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기름기 없는 내장이 한꺼번에 밀어닥친 순대와 비계를 감당하지 못해 초등학교 시절에 그렇게 원했던 '설사의 꿈'이 드디어 이뤄진 것이다. "아이고, 배야.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이구."

우리 집은 소를 키우지 않았다. 송아지 살 돈이 없었다. 소 꼴을 해 올 일손도 없었다. 송아지가 커서 어미 소가 되어도 쟁기질할 장정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소가 없었다. 우리 집에는 돼지우리가 있었다. 우리 속에는 돼지 한 마리가 자라고 있었다. 두 마리 살 돈이 없었다. 두 마리를 먹일 등겨가 없었다. 그래서 한 마리만 꿀꿀거리며 똥을 쌌다.

우리 집에 닭은 대여섯 마리가 있었다. 병아리는 돈 주고 사지 않았다. 암탉이 낳은 달걀이 병아리가 되었다. 암탉 여러 마리가 수탉 한 마리만 데리고 재미있게 살았다.

우리 집 돼지는 어미 돼지가 되면 장사꾼이 싣고 가버렸다. 다음 장날 돼지 새끼 한 마리를 들여 놓으면 숫자에는 아무 변동이 없었다. 돼지 죽 주고 똥 치는 일은 장남인 내 담당이었다. 돼지는 키워서 팔아야 공납금이 되는 줄은 알았지만 그걸 잡으면 돼지고기가 되는 줄은 한참 뒤에 알았다.

어릴 적 생일상에도 돼지고기는 올라오지 않았다. 또래 동무들이 "돼지고기를 많이 먹고 설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설사를 한 번 해 봤으면 싶었지만 설사는 분에 넘치는 꿈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제대로 설사를 한 적이 있다. 큰누나가 결혼을 할 때 키우던 돼지를 잡았다. 결혼 날짜는 우리 속 돼지의 몸집 크기를 보고 정했다. 알맞게 커 잡아도 좋을 날짜에 혼인 예식을 치른 것이다. 우리 돼지는 그냥 꿀꿀이가 아니라 택일을 전문으로 하는 철학관 주인 노릇을 겸하고 있었다.

일곱 살 때부터 닭을 잡았던 나는 예식 전날 돼지를 잡는다기에 신이 났다. 칼잡이 옆에 섰다가 다리를 붙잡아 주고 엉겁결에 싸 붙이는 똥을 치우기도 했다. 순대를 만들기 위해 내장을 장만할 땐 냇가로 따라가 꼬챙이로 창자를 뒤집어 밀가루와 굵은 소금을 뿌려 씻는 일을 거들기도 했다.

잘 삶은 사지는 각을 떠 소쿠리에 담아 바람이 잘 통하는 감나무 가지에 걸어 두었다. 순대는 젖은 삼베 보자기로 덮어 두었다. 불린 찹쌀, 두부와 당면, 부추, 파, 마늘 등을 선지에 버무려 창자 속에 넣고 삶아낸 순대의 맛은 기가 막혔다. 순대는 생전 처음 먹어보는 기이한 음식이어서 슬금슬금 어머니의 눈치를 살펴가며 계속 훔쳐냈다.

비계가 둥둥 뜬 돼지국물에 순대를 넣고 밥까지 말아 두어 그릇 뚝딱 하고 나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저녁답이 되자 마른하늘에 벼락이 친다더니 갑자기 뱃속에서 우르릉하는 천둥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기름기 없는 내장이 한꺼번에 밀어닥친 순대와 비계를 감당하지 못해 초등학교 시절에 그렇게 원했던 '설사의 꿈'이 드디어 이뤄진 것이다. "아이고, 배야.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이고."

토요산방 도반들과 고로쇠 물을 마시러 김천 청암사를 거쳐 수도암엘 갔다. 물 받으러 간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오지 않아 물맛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암자로 올라가니 이틀 전에 내린 눈이 자북하게 쌓여 발목이 빠질 정도였다. 아이젠은 없었지만 눈 산행을 즐길 절호의 찬스였다.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자." 수도산 정상으로 향하는 능선 길은 몹시 미끄러웠다. 어느 누가 소리를 질렀다. "내려가서 지례 흑돼지나 먹자."

지례 흑돼지는 누나가 시집갈 때 잡았던 우리 집 돼지와 모양이 흡사했다. 토종에 아주 가까운 검은 털을 가진 왜소한 체형이었다. 그렇지만 물 맑은 산골에서 자라 비계는 차지고 투명하며 살도 탄탄하고 쫄깃쫄깃했다.

지례에 도착한 후 식당 중에서 손님 신발이 가장 많은 곳으로 들어갔다. '장영선 삼거리식육식당'(054-435-0067)이었다. 고기 굽는 매캐한 연기와 손님들의 "여기 추가요" 하는 소리들이 범벅이 되어 온통 난장판이었다. 음식점이 절간처럼 조용하면 맛은 별로라는 걸 나는 안다.

우리는 소금구이 7인분에 막걸리를 시켰다. 지례흑돼지구이와 상주 은척양조장(054-541-6409)의 '은자골 탁배기' 맛이 멋지게 잘 어울렸다. 오랜만에 맛있는 삼겹살을 한 입 먹어보니 어릴 적 고향 생각이 났다. 갑자기 '설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혼자 웃었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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