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光陽)은 초행이 아니었다. 30여 년 전 식량이 부족했던 시절, 한 톨의 쌀이라도 더 생산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대일(對日) 청구권자금 일부로 소규모 관정(管井'농사용 샘)을 파고 양수기(揚水機)를 도입했다. 논농사만은 걱정 없이 짓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시'군이나 읍'면에서는 그에 따르지 못하고 부실공사를 하거나 양수기를 방치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사실을 간파한 박정희 정부에서는 처음에는 시'도가 산하 시'군 공무원을 동원해 A군 공무원은 B군에, B군의 공무원은 A군에 보내 상호 교환 점검시켜 부실하게 관리한 시장, 군수를 문책하려 했다. 그러나 군 공무원의 경우 소속은 달라도 같은 도 산하의 공무원이기 때문에 적발하기보다는 눈감아주는 일이 많았다.
이런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두 번째 시도한 방법이 범위를 시'도로 확대하여 A도는 B도를, B도는 A도를 교환 점검하도록 하는 한편, 점검반도 농촌진흥청 등 농업 관련 중앙공무원을 포함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때 차출돼 광양군에 배치돼 10여 일 머문 적이 있다. 그때는 제철소도 들어서지 않았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풍수지리설의 비조(鼻祖) 도선(道詵)국사가 생애 중 마지막 35년을 광양의 옥룡사에 주석했는데 그곳이 폐사가 되었다는 기록을 접했다.
고려 태조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도선이 점지해 준 곳이 아니면 절을 짓지 말라고 했을 만큼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의 묘 터 잡기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우리 생활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도선이 머물던 그곳이 어떤 곳이며 폐사지가 어떤 형태로 남아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에 그곳을 방문했었다.
그러나 이번 방문은 달랐다. 옥룡사를 창건하면서 풍수지리 상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국사가 직접 심었다는 동백나무숲을 보기 위해서였다.
출발할 때 비가 내려 다음 기회로 미루려고 하다가 버스를 탔다. 그러나 현지에 도착하니 비가 멈춰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내버스를 탔으나 기사가 옥룡사지의 위치를 모른다고 했다.
이름난 고승이 수도했던 곳이자 천연기념물(제489호)로 지정된 동백나무숲이 있는 곳을 누구보다 자세히 알아야 할 시내버스 기사가 모른다는 점이 퍽 아쉬웠다.
다행히 그 마을에 산다는 어르신이 있어 따라 내렸다. 그는 예전처럼 많이 피지는 않는다고 했다. 열매를 머릿기름이나 식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막대기로 두드려야 꺾인 가지가 많아 꽃이 많이 피는데 요즘은 그런 사람이 없어 그렇다고 했다.
가파른 길을 오르니 울창한 동백나무숲이 펼쳐졌다. 전에 왔을 때는 옥룡사라는 편액을 건 절집 비슷한 건물이 한 동 있었는데 발굴조사로 허허벌판으로 변했고 사적지(제407호)라는 안내판만 서 있었다.
도선국사는 속성이 김 씨로 827년(신라 흥덕왕 2년)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14세에 출가해 화엄사에서 승려가 되고, 846년(문성왕 8) 곡성의 태안사에서 신라 구산선문의 한 파인 동리산문의 개산조(開山祖) 혜철(惠徹 또는 惠哲) 스님의 법문을 듣고 제자가 된 분이다. 운봉산, 태백산 등을 돌아다니며 구도 행각을 하다가 864년(경문왕 4년) 이곳으로 들어와 옥룡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원래 큰 못으로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는데 스님이 불력으로 모두 쫓아냈다고 한다. 그즈음 주변 마을에 눈병이 돌고 숯을 한 섬씩 지고 가서 못을 메우면 눈병이 낫자 모두들 그렇게 해 손쉽게 절을 지을 수 있었으나 서쪽 부분이 허하여 동백나무를 심어 이를 비보하였다고 한다.
스님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탄생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부터 스님은 예언가 내지 풍수지리가로 알려졌다. 스님은 태조 이후에도 극진히 존경을 받았는데 인종이 국사로 추증한 것도 그중 하나이다. 898년(효공왕 2년) 71세로 입적했다.
'도선비기' '송악명당기' '도선답산가' 등이 스님의 저서로 알려져 있으나 이름만 빌린 가짜라는 설도 있다. 스님이 돌아가신지 1천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풍수지리설이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끼쳐 소위 명당을 구하려고 난리를 치고 있다.
그러나 스님이 주장한 비보사상(裨補思想)은 광대한 면적을 가진 중국과 달리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는 명당이 많을 수 없으므로 그것이 집터이든 묘터이든 결함이 있는 부분을 보완해서 사용하면 명당이 될 수 있다'는 뜻일 뿐이라고 한다. 오늘날 폐허로 남은 옥룡사지가 천하에 명당이 없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매화가 지고 나면 동백꽃이 핀다. 여수 오동도, 거제의 지심도 등 동백꽃 명소가 많은데 수령 100년 이상 된 7천여 그루의 옥룡사지 동백나무숲도 그중 한 곳이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국정원, 中 업체 매일신문 등 국내 언론사 도용 가짜 사이트 포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