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로 바람이 세게 불던 어느 날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아내와 함께 추억여행을 떠났다. 나의 본적은 경북 군위군 소보면 내의동. 그곳에 대한 기억들 중에는 비교적 또렷한 것도 있지만 대체로 가물가물하다. 왜냐하면 그곳은 아버지가 태어나신 곳이지만 아버지도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일찍 대구로 출향한 상태여서 늦가을 묘사 때가 되거나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에 가시곤 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 손을 잡고 굽이굽이 먼 길을 걸어서 도착한 그곳은 군위군에서도 특히 낙후되었고 가장 늦게 전기가 들어온 곳으로도 유명하다. 걷느라 힘은 들었지만 추수를 방금 끝낸 누런 들판이며 작은 저수지, 하천, 사과나무 등이 어슴푸레 생각난다.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주던 낯선 친척들. 밤이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반딧불이를 찾아 헤매던 일. 수많은 풀벌레의 합창소리. 호롱불 밑에서 소곤소곤거리던 어른들 대화소리. 웃음소리. 한없이 깊고 무서운 재래식 변소 칸에서 앉았다 섰다 하며 주저하던 일…. 요즘 나는 그곳을 자주 찾게 된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바로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아버지는 갑자기 중풍으로 호흡중추가 마비되고 목 이하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일 년 이상 힘든 투병시간을 보내고 계시던 어느 날 눈빛으로 당신이 태어난 그곳에 묻히고 싶다는 신호를 간절히 보내셨다. 오호통재라…. 공수래공수거. 당신이 태어나신 그곳, 나의 본적에 진눈깨비가 내리던 그해 겨울 그렇게 보내드렸다.
아내의 손을 잡고 대구 동촌 유원지랑 북구 대현동, 안지랑이골, 서문시장, 대명시장과 지금은 없어진 미도극장 주변 골목길 그리고 옛날 어렵게 살았던 삶의 흔적들을 찾아 온종일 돌아다녔다. 학창시절 자주 들르던 남산동 미성당 분식집에도 찾아갔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여전히 허름한 그곳에서 아내와 함께 납작 만두를 먹으면서 평소 잊고 있었던 학창 시절 추억을 되새겨 보았다.
어린 시절의 우리 집은 좀 힘들게 살았던 것 같다. 아버지의 잦은 사업 실패와 잊을 만하면 닥쳐오는 화마(火魔)로 초등학교를 네 군데나 옮겨 다니게 되었다. 부모님이 서문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했던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는 동촌 유원지에 살았는데 나는 서문시장 근처 대성초등학교로 통학하였다. 학교를 마치면 혼자서 동촌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 나루터 배를 건너 집에 갔었다. 그때 버스비가 4원이었는데 사탕이나 군것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 먼 길을 걸어오곤 했다. 때로는 버스안내양에게 차비를 잊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하다가 상습범으로 탄로가 나서 거짓말에 대한 보복으로 종점에 내려 주기도 했다. 버스 길을 따라 해가 지고 한참만에 집에 들어가는 바람에 찾아 나선 부모님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당시 동촌 유원지는 호객행위로 확성기에서 유행가 소리가 큰 소리로 흘러나왔다. 동네 아이들은 박자에 맞추어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마을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때로는 술 취한 어른들의 힘들고 노곤한 삶의 현장을 목격하곤 했다. 그래서 동요보다 트로트를 포함한 웬만한 유행가는 모두 섭렵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즈음 우리 가족의 삶의 터전인 서문시장에서 또다시 큰불이 났다. 허탈해하시는 부모님을 따라 대명시장 바로 옆으로 이사한 이후엔 나는 공부는 뒷전이고 대명시장 미도극장 주변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어울려 놀았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미로와 같은 골목에서 간혹 불량스럽게 일탈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중고등학교 사춘기 시절을 보내면서 늦게나마 철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당시 부모님은 가내수공업을 시작하셨다. 가족들이 함께 호마이카상 다리에 박는 나사못을 가공하는 일을 했다. 여동생과 나는 학교를 마치면 집에 돌아와 불량품을 고르고 포장하는 일을 도왔다. 일을 모두 마치고 나면 자정을 훌쩍 넘기기가 다반사였다. 항상 기름때가 끼어 있는 어머니의 손톱과 집으로 오는 길에 종종 마주치던 어머니의 리어카 배달 모습에 어린 마음에 속상하기도 하고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꼭 성공해서 가난을 면해야겠다는 결심을 다지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대명시장 옆 깊은 골목 안에 20평짜리 우리 집이 처음으로 생겼다. 이번에 찾아보면서 혹시 전에 살던 그 집이 헐리거나 변해서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정겨운 골목길 익숙한 담장이 보이고 대문만 달라진 채로 35년 전과 똑같이 있었다. 틈 사이로 내부를 살펴보았는데 집 구조도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너무나 반가웠지만 여러 가지 상념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창고를 개조한 처음 가진 나의 공부방에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고 불안한 미래를 위해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다. 내 평생에서 아마 이때가 공부를 제일 많이 한 시기였던 것 같다. 나는 의사가 되어 사회와 가정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을 했고 먼 훗날 여유가 되면 부러운 눈으로 항상 봐 왔던 예술을 가까이하고 내 가슴속 예술적 감성을 되살리리라는 생각을 했다.
세월은 누가 흐르는 물과 같다고 했나. 그때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다. 그동안 바쁘게 무언가에 쫓기듯이 살아왔고 어린 시절 추억을 한동안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20여 년 전 안동병원에서 잠시 봉직한 적이 있는데 근무하면서 안동이 고향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안동 지방의 "그러니껴? 아이니더"라는 구수한 말투가 매우 정답고 익숙한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 입향조께서 안동 하회에서 군위로 이주한 관계로 어릴 적부터 친척들을 통해서 평소 듣던 사투리인 까닭이다. 게다가 나는 류성룡 할아버지의 13대손이고 하회마을 안에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작은 집도 있어서 아마 그런 것 같다.
또한 안동에서의 추억거리도 많다. 안동댐에서 피어나는 몽환적인 물안개, 역전 문화갈비집의 소주와 함께 먹은 암소갈비. 새벽바람을 가르고 도착한 만운지에서 느낀 낚싯대 손끝의 짜릿함은 아직도 생생하다. 5일마다 열리는 안동 장날의 살맛 나는 진풍경, 아지매들의 투박하지만 순진한 모습과 정겨운 사투리를 통해 고향의 끈끈한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안동은 늘 어머니 품 같은 느낌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이제 나는 혼란스럽다. 진정한 나의 고향이 어느 곳인지 나도 모르겠다. 아버지를 통해서 느낀, 아버지가 계신, 아버지의 영원한 고향 군위군 소보면. 어린 시절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고 미로와 같은 좁은 골목길에서 성장통을 겪었던, 지금은 대도시로 변해버린 대구의 구석구석. 익숙하고도 유명한 유교의 본향으로 너무 알려진 하회마을이 있는 안동….
그러나 이 모든 곳은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추억을 가져다준다. 이 중에서 고향을 하나만 고르는 것은 나에겐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모든 곳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자양분을 공급했을 것이고 성장하면서 이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이 나의 DNA에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 품과 같은 고향이 많다면 오히려 삶이 훨씬 여유로워질 것이고 그곳에서의 소중한 추억거리는 정다운 모습으로 늘 가슴에 아련하게 남아있게 될 것이다.
류형우 파티마여성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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