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유니폰 벗었지만 가슴속 태극마크는 아직도 뚜렷이…"

불멸의 국가대표 그들은 지금…

88올림픽 시상식에서 유도 스타인 김재엽 선수의 위풍당당했던 모습 VS 현재의 동서울대 김재엽 교수.
88올림픽 시상식에서 유도 스타인 김재엽 선수의 위풍당당했던 모습 VS 현재의 동서울대 김재엽 교수.
현정화 선수와 짝을 이뤄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시절의 권미숙 선수 VS 대구 북구 태전동에서 탁구클럽을 운영 중인 권미숙 관장.
현정화 선수와 짝을 이뤄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시절의 권미숙 선수 VS 대구 북구 태전동에서 탁구클럽을 운영 중인 권미숙 관장.
축구 국가대표 시절의 김현수 선수 VS 현풍고에서 지도자로 활동 중인 김현수 감독.
축구 국가대표 시절의 김현수 선수 VS 현풍고에서 지도자로 활동 중인 김현수 감독.

누구나 인생에 '나도 왕년에'가 있고, '나름 전성기'가 있다. 속칭 잘나가던 때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기량이 절정에 올라 있거나 모든 상황이 자신의 의도대로 잘 흘러가고 있는 시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스포츠 선수들에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저마다 전성기가 있다. 특히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대한민국을 대표해 뛰던 국가대표들은 그 느낌이 더 진하다.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 등에서 메달이라도 목에 걸면 그 자부심은 하늘로 치솟는다. 종합편성채널 채널A에는 '불멸의 국가대표'라는 프로그램도 있다. 각 종목별 스타급 선수들이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며 현 시점에서 각종 의미 있는 도전을 하면서 재미를 주고 있다.

지역에도 국가대표 출신들이 있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대체로 답은 예상된다. 대부분은 자신이 했던 스포츠 종목에서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사업이나 다른 분야에 도전했다가 쓰디쓴 실패를 맛보고 다시 자신이 걸었던 길로 돌아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때 이름을 날린 선수였으나 사업에 실패한 뒤,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서 배추장사를 하는 스포츠 스타도 있다.

지역 출신으로 한때는 태극마크를 달고 국위를 선양했으며 지금은 새로운 분야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봤다.

#1. 올림픽 금메달, 유도 김재엽(49)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던 화려한 경력의 사나이다. 잘생겨서 더 많은 인기를 누렸다. 자색 계통의 한복을 입고 시상대 맨 위에 올라 금메달을 목에 걸고, 위풍당당하게 두 손을 하늘 높이 든 그의 모습은 아직도 국민의 뇌리에 남아 있다. 김재엽 씨가 대구 중앙중학교 재학 시절에 그를 지도했던 한상봉 두류유도관장은 "재능이 남달랐고, 안병근'이경근'김병주 등과 함께 대구가 낳은 대표적인 유도스타"라고 말했다. 두류공원에 위치한 안병근 올림픽기념 유도관에 가면 이들의 화려한 선수 시절 모습을 사진으로 볼 수 있다.

한 관장을 통해 김재엽 씨 휴대전화 번호를 알아 통화를 했다. 김 씨는 계명대에서 유도를 지도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금은 동서울대 스포츠학부 경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선수 생활도 화려하게 했지만 지금도 나름대로 저의 전성기입니다. 중간에 옆길로 새 사업(전자상거래)을 하다 실패하기도 했지만 국민대 석사와 경희대 박사과정을 거쳐 지금은 경호학의 이론과 실기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김 교수는 스포츠 스타들이 은퇴 후 겪게 되는 여러 어려움에 대해 언급했다. "88올림픽 금메달을 땄을 때만 해도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저는 잊혀진 존재가 됐습니다. 선수생활을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실패했습니다. 여러 어려움이 겹치면서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그는 대구에서 태어나 남산초등학교, 대구 중앙중학교, 계성고를 거쳐 계명대 1학년 때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1983년 세계청소년유도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유도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땄으며, 이후 올림픽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 금빛 또는 은빛 메달을 목에 걸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는 유도 국가대표팀 코치로 활약하기도 했다.

#2. 제2 양영자 꿈꿨던 탁구 권미숙(42)

경북 영양군에서 탁구 국가대표가 배출됐다. 이름은 권미숙. 동네 경사다. 산골짜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우연히 접한 탁구에 재능을 보여 승승장구했다. 경주 근화여자중학교에 스카우트되면서 영양군을 벗어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 탁구 국가대표 시절에는 대한민국 여자 탁구의 간판인 양영자-현정화 선배 등과 함께 국위 선양에 앞장섰다.

"국가대표팀에서 3년간 현정화 선수와 복식조를 이뤄 열심히 했습니다. 1989년 독일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1992년 러시아 올림픽파노라마 국제탁구대회 우승 등의 성적을 거뒀습니다. 대표팀에서 양영자 언니(6살 차이)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다르고 싶었습니다. 그 빈자리를 메우고 싶었지만 부상 등으로 올림픽'아시안게임 등과는 인연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대표팀 시절은 행복했습니다."

하회전성 서브로 유명한 전진속공형 선수였던 권 씨는 1988년부터 1993년까지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리고 은퇴 후 일본으로 건너가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그러다 결혼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주부로 살았다. 하지만 들끓는 피는 어쩔 수 없는 법. 2007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내건 탁구클럽을 시작했다. 5년째 잘 운영하고 있다. 또 한 가지 덤으로 얻은 것도 있다. 딸 한송이(10'초교 3년) 양이 뒤늦게 탁구의 묘미를 알기 시작했는데, 곧잘 하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구나!'라며 뿌듯해하고 있다.

#3. 12년 태극마크, 축구 김현수(39)

대학교 1학년 때 국가대표 상비군(50명)에 선발되어 태극마크를 처음 달았던 현풍고 김현수 감독은 2003년 일본에서 열린 동아시아대회 우승까지 12년 동안 축구 국가대표팀을 들락날락했다. 어떤 해는 빠지기도 했고, 어떤 해는 또 들어가서 주전으로 맹활약을 했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는 프로축구 성남 구단에서 프로 선수 활동을 했고, 이후 인천, 전남 등을 거쳐 대구FC에서 화려했던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국가대표 축구팀에서 주로 최진철, 김태형 등 후배 선수들과 같은 포지션인 스토퍼(센터 백)를 맡고 있어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축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었고, 우승했을 때는 수비수로서의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국가대표에 몸담았던 기간이 길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영광입니다."

그는 은퇴 이후 브라질, 유럽 등에서 공부를 한 뒤 현풍고(대구FC U-18세팀)를 축구 명문학교로 만들어가고 있다. 2009년 창단 이후 3년 만인 지난해 8월 제52회 청룡기 전국고교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일궈내기도 했다.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보여준 것이다.

"현역 시절 우승보다 100배 더 기뻤습니다. 잘 참고 따라준 선수들이 고마웠습니다. 후배를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된 일인지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선수들의 기량이 향상되고,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올해는 고교 챌린저리그에서 3위 안에 들어 왕중왕전에 나가는 것이 현실적 목표입니다. 5년 뒤에는 더 성숙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지역 축구 발전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김 감독은 스포츠인으로서 또 다른 직책도 맡고 있다. 지난해 초부터 각종 종목의 체육인들이 모여 있는 열체모(열정적인 체육인들의 모임) 회장을 맡아 지역 체육인들의 친목도모와 봉사 등에 앞장서고 있기도 하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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