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워하고 슬퍼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분이 너무 지나쳐서 생활에 지장을 줄 만큼 부적절하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기분을 경험하고 표현하는데 주된 문제가 있는 장애들을 통칭해 '기분장애'라고 한다. 대표적 질환으로 '주요우울장애'(단순 우울증)와 '양극성장애'(조울증)가 있다. 흔히 조울증은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들떴다가 가라앉았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기분이 들뜨는 시기와 가라앉는 시기가 일정기간 지속된다. 특히 양극성장애 환자들이 '조증'으로 재발하는 경우는 봄철에 가장 흔하다.
◆"뭐든 할 수 있어!" VS "뭐든 할 수 없어~"
"내가 왜 여기 오냐고?" 조증(躁症)은 기분이 들뜬 상태를 말한다. 조증 상태의 환자는 병원 진료실에 들어서면 금방 알 수 있다. 일단 목소리가 크고 힘이 있다. 쉽게 흥분하고 자기주장이 확고하며, 말수가 많고 타인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A씨는 평소에 내성적이고 조용하던 30대 가정주부다. 역사 교과서 왜곡을 일본에 가서 직접 항의하겠다며 인천공항 출국심사대에서 횡설수설하는 환자를 가족들이 연락을 받고 급히 데려왔다. A씨는 4주 전부터 이유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마구 떠올라 그녀의 수첩은 며칠 만에 깨알 같은 계획으로 가득 찼다.
하루가 24시간인 것이 너무 아깝다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인터넷 쇼핑몰과 TV 홈쇼핑을 통해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2천만원어치나 사들였다. 별일도 아닌데 곧잘 흥분하고 고집을 피우며, 남편과 시집 식구들을 무시해 2주 전 제사에서 큰 불화가 있었다. 며칠 전 일본의 교과서 역사왜곡을 TV로 지켜보며 지나치게 흥분했다. 거의 반강제로 진료실에 들어와서는 자신의 정당함과 배달민족의 여장부로서 일본 응징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힘이… 하나도 없어요. 진짜 죽을 힘도 없다더니…." B씨는 20대 학원강사다. 우울증 때문에 친언니와 같이 병원을 찾았다. 기어들어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여서 귀 기울여 들어야만 했다. "아침에 눈 뜨는 게… 제일 싫습니다. 긴 하루를 또 어떻게 보내나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모든 게 귀찮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보가 된 것 같습니다. 멍하게 그냥… 집에만 있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언니가 답답했는지 이야기를 거들었다. B씨는 원래 밝고 쾌활한 성격이어서 친구가 많고 학원에서도 아이들에게 인기가 가장 좋았다. 몇 달 전 동료 강사들과 작은 오해가 생겼는데 의도하지 않게 점점 커져서 결국 억울하지만 A씨만 학원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한동안 바깥출입을 안 하고 침울해 있어서 이번 일로 충격을 받아 그러려니 생각하고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친정에 가 볼 때마다 점점 더 심해져서 결국 억지로 병원까지 데려왔다고 했다.
◆우울증과 양극성장애는 달라
A씨는 의학적으로 '양극성1형장애 중 조증삽화'로, B씨는 '양극성2형장애 중 주요우울삽화'로 진단됐다. 기분의 변화가 일정기간 지속되다 회복되는 것을 '삽화'라고 한다. 양극성장애는 더 세분해 '우울증삽화' 외에 평생 한 번이라도 '조증삽화'가 있었다면 양극성1형장애로 진단되고, 조증보다 정도가 약한 '경조증삽화'가 있었다면 양극성2형장애로 분류된다.
A씨의 증상은 전형적인 조증에 해당한다. 비정상적으로 들떠서 과한 기분 상태가 지속된다. 의욕과 에너지가 넘쳐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넘친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피곤해 하지 않고,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생각의 속도와 양이 빠르고 많아서 말수가 많아진다. 주의집중이 안 되기 때문에 이들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은 경우가 많다. 수면이나 식욕 등의 기본욕구가 줄어든다. 돈을 흥청망청 써 버리고 과대망상이 있으며 고집이 세고 쉽게 흥분해 시비를 잘 건다.
B씨는 우울증 상태이다. 기분이 가라앉아 매사에 의욕과 기운이 없고 쉽게 피곤해 한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우유부단하며 모든 게 부정적이고 지나치게 자책을 한다. 삶의 가치를 못 느끼고 죽음을 생각한다. 체중이나 수면이 줄기도 하지만 오히려 늘어나는 경우도 있다. 머리에 생각이 하나도 없어져 멍하기도 하고, 생각이 너무 많아 괴롭기도 하다. 알 수 없는 불안 때문에 힘들 때도 있다. B씨는 추가 면담과 검사를 통해 이전에 '경조증삽화'를 겪었던 병력이 확인돼 '양극성2형장애'로 진단됐다.
◆재발할수록 치료 어려워져
화려한 증상을 보이는 조증 때문에 양극성장애는 진단이 쉬울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양극성장애에서 우울 상태와 단순 우울증(주요우울장애)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양극성장애의 우울 환자가 항우울제를 복용할 경우, 자칫 치료반응과 질병 경과를 악화시킬 수 있으므로 정확한 진단 없이 무분별한 항우울제의 사용은 자제해야 한다.
▷어린 나이에 우울증이 발병한 경우 ▷기분장애의 가족력이 있는 경우 ▷항우울제 복용 후 며칠 만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거나 가벼운 조증이 생긴 경우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더 불안해지거나 호전이 없는 경우 ▷자주 재발하는 우울증 ▷수면과다와 심한 기력 상실을 보이는 우울증이 있을 경우 '양극성장애' 감별을 위해 면밀한 진료가 반드시 필요하다.
양극성1형장애의 평생 유병률은 약 1% 정도로 남녀가 비슷하고, 양극성2형장애는 0.5% 정도로 여성이 더 많다. 발병 원인은 모른다. 다만 여러 연구 결과 대뇌의 기분을 조절하는 부위의 이상 때문이라고 본다. 조증 상태는 대뇌에 있는 도파민, 세로토닌, 노르아드레날린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과다하고 우울 상태는 그 반대이다. 이런 물질들을 안정화시키는 기분안정제를 치료제로 사용한다. '양극성장애'는 재발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이를 막기 위한 유지기 치료가 반드시 필요하다.
경북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원승희 교수는 "조증이든 우울이든 그 시기가 지나면 그런대로 안정적이기 때문에 병이 나았다고 착각하고 약물 복용을 중단한다"며 "하지만 자주 재발할수록 조증과 우울증의 주기가 짧아지고 약물에 대한 치료 반응이 떨어지기 때문에 증상이 없거나 잦아든 유지기의 예방치료가 양극성장애 치료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도움말=경북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원승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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