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행복을 요리하는 의사] 그날 이후

"김 과장, 표정관리 해야 하는 거 아니었어?" 안과 윤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얼마 전 엄마 장례식에 조문왔을 때 이야기였다. 장례식장에서 엄마를 떠나보내는 우리 가족의 분위기가 일상의 장례식장과는 사뭇 달랐다는 것이다.

그 말에 나는 좀 멋쩍었다. "왜요?" "꼬집어 말 할 수는 없지만, 이제까지 내가 가 본 상갓집 분위기와는 좀 달라서….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지. 김 선생은 죽음을 많이 봐서 단련돼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김 선생의 다른 가족은 아니잖아?"

우리가 그랬나? 나도 한때 그처럼 의아해 한 적이 있었다. 문득 호준 씨 생각이 났다. 40대 중반의 바짝 마른 호준 씨는 정확하게 47일간 우리 병동에서 아버지 곁을 지키며 우리와 함께 지냈다. 교장 선생님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말기 후두암이었고, 아버지의 유언대로 그는 마지막까지 남의 도움 없이 직접 아버지를 돌보았다. 두 달간씩이나 휴직을 한 채. 나는 아버지를 애틋하게 보내는 호준 씨가 내심 걱정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문상 가서는 쓸데없이 괜한 걱정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누구보다 활짝 웃으면서 조문객을 맞이하는 그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상실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정이 필요하다.

죽음이라는 마침표를 찍는 순간부터가 아니라, 살아있을 때부터 해야 한다. 호스피스 돌봄을 받은 가족은 그런 과정이 입원과 동시에 시작되기 때문에 착잡한 심정에서 회복되는 속도가 빠르다. 그래서 난생처음인 죽음 뒤에도 멀쩡해 보일 수 있다.

37살의 꽃 같은 아들을 떠나보내는 엄마가 있었다. 조문 온 아들 친구에게 오열을 토하는 대신 '아들 대신 건강하게 살아 달라'고 따뜻한 국밥을 권하는 여유로움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녀가 생판 모르는 내 손을 붙잡고, 병원 복도에서 피눈물을 흘린 것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답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봐라."

엄마가 마지막으로 임종실에 누워 있을 때, 들려오는 처량한 만돌린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그때 서울 사는 언니가 내려왔고, 사우디에 출장 가 있던 제부가 동생과 함께 허겁지겁 도착했다. 남동생도 며칠 밤을 새우며 엄마를 지켰다. 어린아이처럼 잔뜩 겁에 질리면서 시작한 엄마의 죽음이 여유로워진 것이다. 호스피스 돌봄의 제공자에서 대상자로 바뀐 나는 엄마가 떠난 다음 병동에서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여러분이 없었더라면 정말 힘들었을 겁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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