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중이염 치료를 받으러 간 적이 있어요. 손으로 제 귀를 살펴보던 의사가 진료차트를 확인하더니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더라고요. 갑자기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제 눈앞에서 휴지통에 던져버렸어요. 진료차트에 제가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 감염자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이즈는 피부가 닿는다고 감염되는 질환이 아닌데 말입니다. 이런 일만 수십 차례 겪었어요. 그럴 때마다 자살 충동을 느꼈습니다."
10일 오후 대구 동구 레드리본센터에서 만난 에이즈 감염자 여운(58·가명) 씨는 에이즈보다 사람들의 편견 섞인 시선이 더 아프다고 했다.
◆에이즈보다 더 무서운 외로움
여운 씨의 고향은 부산이다. 한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하며 부인과 남매를 먹여 살리는 어엿한 가장이었다. 하지만 4년 전 비극이 시작됐다. 2008년 계단에서 넘어지면서 오른쪽 귓속 고막을 다쳐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는 중이염 진단과 함께 진단 하나를 더 내렸다. 에이즈 양성 확진을 받은 것. 언제, 어떻게 에이즈에 감염됐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부인은 에이즈를 이유로 여운 씨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당시 결혼을 앞두고 있던 30대 아들과 초등학생 딸도 데리고 떠났다.
이때부터 여운 씨의 외로운 투병 생활이 시작됐다. 다친 고막이 신경을 건드린 때문인지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스스로 일어서야 했다. 외출도 거의 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지내다 보니 병원에서 우울증과 불면증 진단도 받았다.
사람들의 편견 섞인 시선도 힘들었다. "웬만큼 아프지 않으면 병원에 가지 않고 참았어요. 의사와 간호사들이 뒤에서 에이즈 환자라고 수군거리며 쳐다보면 견딜 수가 없었어요. 가볍게 던지는 조약돌 같은 말이지만 저는 바윗돌에 맞은 것처럼 아팠어요."
여운 씨가 자살을 시도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국내 에이즈 감염자의 사망 원인 2위가 자살이라고 들었어요. 게다가 자살을 선택한 에이즈 감염자의 80%가 유서에 외로움을 이유로 적었다고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 상황이었어요."
◆살고 싶은 이유가 생겼다
외롭게 투병 생활을 하던 여운 씨가 한 줄기 빛을 본 것은 2009년이었다. 부산에서 다니던 한 보건소 관계자의 소개로 대구에 있는 레드리본센터를 찾은 것. 이 센터는 대구경북지역 에이즈 감염자들을 대상으로 상담 서비스와 쉼터를 제공하고, 학교와 공공기관 등을 돌며 에이즈 예방 홍보, 교육 등을 하는 곳이다. 레드리본센터 차명희 상담팀장은 "대구로 온 여운 씨가 같은 처지의 에이즈 감염자들을 만나면서 말수도 늘었고, 우울증과 불면증 증세도 나아졌다"고 말했다.
여운 씨는 최근 센터에서 제공하는 취미 프로그램 중 꽃꽂이에 재미를 붙였다. 솜씨가 좋아 꽃꽂이 화분 수십 개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몸 상태가 좋아지면 꽃집을 운영하고 싶어요. 참, 저의 또 다른 취미는 시를 쓰는 것입니다. 시집도 내고 싶어요. 그리고 요즘 에이즈 감염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봉사활동도 더 많이 하고 싶어요." '자살' 두 글자밖에 없던 여운 씨의 머릿속에는 이제 앞으로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로 가득하다.
◆하늘이 정해 준 수명만큼 살고 싶어요
이제 여운 씨에게 에이즈는 일상생활에서 조금만 주의하면 되는 만성질환일 뿐이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외로움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4년 전 다친 고막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자꾸 쓰러지는 등 몸 상태가 걱정이다. 그래서 이달 대구의 한 종합병원에 입원하기로 했다.
문제는 치료비다. 아무렇게나 방치했던 고막을 치료하는데 400만원 정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여운 씨의 재산은 보증금 100만원에 월 9만원을 내며 살고 있는 쪽방이 전부다. 구청에서 생계지원금으로 월 20만원을 받고, 의료급여로 월 40만원을 받지만 치료는커녕 당장 생활비도 빠듯하다. 더욱 막막한 것은 평생 들어갈 에이즈 치료비다. 허약한 몸에 곧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인 그가 할 수 있는 돈벌이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그래도 여운 씨는 삶의 끈을 놓지 않는다.
"에이즈 감염자의 생존율이 암 환자의 생존율보다 높다고 해요. 국내에서 1985년에 에이즈 진단을 받은 뒤 아직까지 살아있는 사람도 있어요. 85세의 노령 에이즈 감염자도 있습니다. 완치는 불가능하지만, 적절히 치료를 받으면 하늘이 정해 준 수명만큼 살 수 있어요. 세상에는 시간이 해결해 주는 일들이 참 많더라고요. 가족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계속 살다 보면 분명 기회가 오겠지요."
황수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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