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제사가 없다. 어머니가 크리스천이기 때문이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십계명을 섬기는 어머니의 위엄에 눌려 제사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고향 뒷산에 누워 '다른 신' 대접을 받고 있는 아버지는 배고픔을 어떻게 이겨내고 계시는지 궁금하다. 예수와는 인사 한 번 나눈 적 없이 이승을 살다 가신 외로운 영혼은 술 한잔에 밥 한술조차 잡숫지 못하고 기아에 허덕이다 저승보다 더 먼 곳으로 또다시 운명하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동육서'니 '생동숙서'니 하며 제상 차리는 법을 배워 내 혼자 엎드려 절한다고 해도 가족들이 동의할 리가 없다. 숙고 끝에 고안해 낸 것이 마음속에 촛불 하나를 켜고 고인을 추모하는 일이었다.
1970년대 초, 내가 다니던 신문사의 사장님이 돌아가신 후 2년쯤 지났을까. 사장님의 맏아들에게서 "올부터 제사를 함께 지냈으면"하는 제의를 받았다. 슬하에 딸뿐인 그는 홀로 술 따르고 절하는 등 보조역 없는 제사장 역할 하기가 몹시 바빴던 모양이다.
기일은 추석을 쇠고 엿새째 되는 날. '저녁 7시에 제사를 지낸다'는 연락이 왔다. 술자리서 괜히 해본 농담이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시간에 맞춰 도착한 나에게 유건을 씌우고 흰 광목 두루마기를 입혔다. 나는 타인의 제상 위에 내 마음속에서 홀로 타고 있는 아버지를 위한 촛불을 슬그머니 옮겨 놓았다.
제사는 7년간 계속됐다. 그러다가 친구가 간암으로 저승에 가버렸다. 운명하기 전 육탈 현상으로 미라처럼 변한 그는 "하루만 상주 노릇을 해 달라"고 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장례 당일 검은 양복에 완장을 차고 내빈접대 역으로 나서 친구와의 약속을 지켰다.
제사가 또 하나 늘어났다. 가장 존경하는 은사께서 쉰하나란 이른 나이에 갑자기 운명을 달리하신 것이다. 선생님은 셰익스피어를 전공한 영문학자이자 '우물'이란 작품을 써 서울신문 현상공모에 당선한 희곡작가였다. 그보다도 선생님에게 가장 걸맞은 칭호는 '로맨티스트'로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가장 높았다.
선생님께서 교수재임용에서 탈락하신 후 단골집인 '혹톨쿠럽'으로 나를 불러 울분을 쏟아 놓으셨다. 그날 밤 술자리를 끝내고 택시로 집 앞까지 모셨으나 "아니야, 오늘은 자네 집에 가봐야 해"라고 말씀하시곤 내리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별 안주 없는 맥주 몇 병을 드시고는 비 오는 밤길 속으로 총총히 떠나셨다. 그게 선생님과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선생님이 어떻게 우리 집에 오실 생각을 하셨을까. 그날 밤 선생님은 이승에서 꼭 끝내고 가야 할 숙제를 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임종을 앞둔 사람은 생전에 가봐야 할 곳은 죄다 둘러본 후 마음속에 미진한 찌꺼기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운명한다고 한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세상이 너무 쓸쓸하여 술 맛조차 나지 않았다. 그래서 기일(8월 15일) 다음 날을 제삿날로 정하고 선생님의 단골집인 '혹톨쿠럽'에서 혼자 촛불 하나 켜놓고 제사를 지냈다. 생맥주 500㏄ 두 잔을 시켰다. 내 것 다 비울 동안 선생님 잔은 그대로였다. 다시 한 잔을 시켜 잔을 바꾸고 그 잔은 내가 마셨다. 재미있는 이승의 소식을 전해 드려도 선생님은 묵묵부답이었다. 이 촛불 제사는 만 5년 되는 해인 1982년 선생님의 지인들을 초대하여 탈상 제사를 올리는 것으로 끝을 냈다.
최근 선생님이 쓰신 '우물'이 포항시립극단 제156회 정기공연 작품으로 포항시립중앙아트홀 무대에 올려졌다. 배우들의 대사와 몸짓에서 선생님의 낭만기를 느낄 수 있었다. 공연을 보는 중에 선생님을 모시고 술 한잔 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연전에 선생님을 추모하는 글에 '이승과 저승을 통틀어 단 한 사람만 초청하여 술을 마시라면 기꺼이 선생님을 초대하고 싶다'고 쓴 적이 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제삿밥을 잘 짓는 음식점을 수소문해 두었다가 근사한 촛불 제사를 한 번 지내볼 생각이다. 장소가 바뀌었더라도 혼령은 '귀신같이' 찾아오셔서 "활이 너, 수고했구나"하시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겠지.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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